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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 백야 下

#이사 2016. 7. 22. 00:31



이제 겨우 입대한지 두 달차, 아직은 외운 얼굴보다 못 외운 얼굴들이 몇 배는 많은 신참 대원은 오키타보다 고작 세 살 많았다. 솔직히 귀신부장 정도 되는 남자는 너무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느낌이라 소속감을 느끼게 해줄 정도의 친밀함은 없었다. 그가 가장 강렬하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간부는 당연히 오키타 쪽이었다.



그들의 대장은 어리기도 어렸고 다른 번대와 비교해도 규범이나 상하관계에 있어 퍽 너그러운 편이었다. 가끔은 집에 두고 온 남동생 같기도 하고 함께 작당해서 못된 짓을 할 때는 친구 같기도 해서 신참들에게는 1번대에 배정받는 것이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일이었다. 게다가 기회가 맞는다면 이렇게 시시껄렁하지만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내심 오키타를 찾아오라는 상관들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이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덩그러니 방치된 탓에 하루를 꼬박 쏟아도 머리카락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지만 이젠 슬슬 그의 버릇과 패턴에 많이 익숙해져서 조금만 발바닥에 땀나게 돌아다니면 오키타를 잡을 수 있었다. 원활한 임무수행일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그는 오키타가 어떤 날씨를 좋아하고 어떤 곳에서 비를 피하고 어느 장소에서 낮잠을 자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친밀감을 쌓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제법 오키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녀석에게 있어 저의 대장은 요새 들어 어딘지 알게 모르게 달라 보인다고 느끼는 때가 종종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언제나 밝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밝음이 9할 이상 차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얼굴 한 구석에 드문드문 먹구름이 드리기 시작하더니, 화사하기만 하던 오키타의 채도를 한순간에 확 끌어내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짙은 농도의 색깔이 한꺼번에 섞이게 되면서 그의 분위기는 상상이상으로 많이 변해버렸다.



뭔가 이상한 것을 집어삼키기라도 했는지 이유도 없이 눈길을 잡아끄는 것 하며 밑바닥 어딘가에 스며있는 우울한 기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쓰이게 만들었다. 뭔가에 찔린 것처럼 아주 짧게 따끔한 얼굴을 한 오키타는 어느 순간 톱니가 어긋난 것처럼 기묘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말랑한 피부의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처음으로 그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했다.



오키타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의지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당황하는 것 말고는 설명할 게 없었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려는 것보다 오키타의 뒷덜미가 누군가에 의해 낚아채지는 게 더 먼저였다.



“억,”



뭐라고 소리도 내지 못한 그 짧은 순간에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오키타는 타의에 의해서 마루 위로 끌어 올려졌다. 당겨진 옷에 목이 졸려 새된 신음이 튀어나왔다. 오키타가 스카프를 움켜쥐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히지카타가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신참의 얼굴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갔다. 이건 그러니까… 빼도 박도 못하게 뒷얘기를 하다 현장에서 딱 걸린 모양새? 머릿속으로는 온갖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흩어졌다.



오늘이 제삿날이겠거니 하고 그가 홀로 경악에 물들어가는 찰나, 찰싹 하는 매서운 마찰음이 들렸다. 목 졸립니다. 오키타는 뻔뻔하고 태평스러운 말투로 히지카타의 손등을 때렸다.



찰나의 순간 상대가 누구든 자기 목덜미를 조른 인간은 무조건 잡아 족치겠다, 외치던 눈빛이 그래도 히지카타를 보고는 다소 누그러져있었다.



“아… 하마터면 정말 부장자리 내가 가질 뻔 했거든요? 내가 개도 아니고 목덜미는 왜 잡습니까.”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오키타의 도발을 들으면서도 히지카타는 마루 끝에 앉아있는 신참 대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면으로 귀신 부장의 싸늘한 기운을 받아내고 있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쟤도 나도 일진이 사납네.


오키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힘주어 히지카타의 손을 풀어냈다. 순간적으로 저세상을 떠날 만큼 강하게 졸렸던 목이 아팠다. 잠깐 좁아졌던 기도를 확장하게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바탕 싸움판이 일어나기 전의 마지막 숨고르기가 될 것이었다.



히지카타가 다 들은 이상 싸우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좁은 마루에 서서 셋이나 복닥거리는 꼴도 싫었고, 그래도 딴에는 제 휘하의 대원인지라 오키타는 일단 운수가 더러운 신참을 먼저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이쪽 말에 맞장구를 쳐준 죄밖에 없는데다가 아무래도 녀석에겐 히지카타의 살기어린 눈빛을 받아넘길 담력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까짓 담력은 썩어 넘치는 저라도 대신 해결해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히지카타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



“가봐.”



엄청난 위압감으로 녀석에게 뭔가 쏘아붙이려는 히지카타를 한 손으로 막으며 오키타는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가보라는 손짓까지 덧붙였지만 어지간히도 겁을 먹었는지 그는 히지카타와 오키타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름대로 인심 쓴 거였는데 그것도 받아먹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또 다시 터졌다. 오키타는 웃음기 섞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내가 해결할 테니까 가봐. 직속상관이잖아. 이 정도는 막아줘야지.”



말하며 오키타는 흘끗 히지카타를 돌아보았다. 평대원 앞에서 ‘이 정도’가 되어버린 게 기분 나쁜지 히지카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오키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나마 온전히 오키타에게 돌아간 시선에 용기를 얻었는지 여태껏 굳어있던 대원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였다. 녀석이 저 멀리 돌아서 사라지고 나서도 서릿발 내린 시선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묵을 대로 묵은 한숨을 삼키는 오키타에게 서늘한 빈정거림이 내려앉았다.



“네가 이렇게나 끔찍하게 부대원을 챙기는지 몰랐는데?”



“그건 말 그대로 히지카타씨가 몰라서 그럽니다. 나 제법 인기 있는 대장이거든요.”



“너희 대에 신참들이 몰리는 건 인기 있어서가 아니라 만만해서다.”



“나 참, 그런 억지까지 부릴 만큼 부럽습니까? 억울하면 그쪽도 대장하던가.”



시큰둥한 말투와 함께 오키타는 히지카타의 손을 딱 잘라 튕겨냈다. 억지로 잡아당겨진 제복과 스카프가 흐트러져 있었다. 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오키타는 뭐 어쩔 거냐는 당돌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그 태연함에 히지카타는 울컥 치받는 표정이었다.



“뭘 잘했다고 대들어? 아주 소문을 내지 그러냐?”



“아 그럴걸 그랬나요. 사실은 니들이 그렇게 궁금해 하는 히지카타씨는 밤마다 나한테 발정한다고?”



“…너 지금 말 다했어? 어디 계속 입 함부로 놀려봐.”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오키타의 말을 일갈하며 위협했다. 당연히 ‘너는 1번대 대장이라는 녀석이 채신머리없게’부터 시작하는 히지카타의 잔소리 레퍼토리가 쏟아질 거라 예상하고 있던 오키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목에 핏대를 세워 폭언을 퍼붓던 평소와는 그 음성부터가 달랐다. 마치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맹수의 음성이었다.



“뭡니까 히지카타씨. 진짜로 화났어요?”



예상했던 것보다도 그는 굉장히 더 진지했다. 적당히 싸움을 거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범주를 빗나간 반응에 슬슬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뭘 어디서부터 들었기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저기압인지 모르겠어서 오키타는 찬찬히 방금 전의 대화를 돌려보았다.



물끄러미 바닥부터 훑어 올라가던 눈이 히지카타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했다. 역시나 예사롭지 않은 분노가 틈을 봐서 언제라도 터질 것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 그래. 누나 얘길 내가 했지.’



뒤늦게 대화의 거의 맨 앞까지 거슬러 올라가자 그제야 그럴싸한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미츠바의 얘기를 꺼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마 히지카타는 그게 미츠바를 염두에 둔 얘기였다는 걸 알아 차렸을 것이었다.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부아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냥 당신 옆에는 그녀가 제일 잘 어울린다는 뜻이었는데. 뭐 그리 못할 말을 했다고….



도대체 얼마나 소중하기에….



또 다시 잔뜩 구겨진 연심은 피를 토해내었다. 제발 그만하라며 피눈물을 흘리는 가련한 것을 무시한 채 오키타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지껄였다.



“눈 좀 풀지 그래요? 머리가 있으면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알거 아녜요.”



“…무슨 소리야.”



“말할 생각 없어요. 아무한테도 알릴 생각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요.”



그리고 남들 앞에서 누나를 우습게 만들 생각 손톱만큼도 없었다고. 오키타는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제 입에서 미츠바의 이름이 나오면 얼마나 싸구려 같아 보일런지 걱정스러웠다.



이런 추잡한 자기변명에 귀한 그녀를 입에 담는 것조차 사치스러워 오키타는 말없이 고개만을 내리깔았다. 때 맞춰 나타난 수치심은 목덜미와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얼마간 지독한 정적 속에 내팽개쳐져 있었을까, 낮은 한숨이 흐르며 히지카타는 오키타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시린 눈동자는 어느새 그 안에 고인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너 자꾸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데…. 지금, 내가 왜 화내는지 알고 있어?”



알고 있거든요. 그놈의 고고한 자존심, 싫을 만큼 잘 알고 있거든요. 마음속으로 주억거리는 소리를 겉으로 꺼낼 만큼 오키타는 눈치가 없진 않았다. 히지카타가 지금 평소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그 정도인가…….



수치심에 이끌려온 자존심이 고갤 들었다. 적절한 대응책은 안개에 싸인 듯 흐려지고 어디 잠들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존심이 뾰족하게 갈린 머리꼭지를 보였다.



근 10년간 함께 자랐던 남자니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건 훤히 들여다 볼 정도로 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역시나 오만이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활활 타오르는 남자의 시선이 따가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혹시나 뭔가를 놓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이정도 되는 크기의 지뢰라면 적어도 밟았다는 자각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혹시… 내가 누나를 입에 담는 것조차 싫은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주제넘은 거 아닌가요? 당신 여자기 전에 우리 누나거든요?”



고뇌 끝에 자신 없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미츠바 얘긴 왜 나와!”



히지카타는 이젠 참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세가 무시무시해서 오키타는 점점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냥 하나도 모르겠고, 더는 모르는 걸 찾아 헤매고 싶지도 않고, 자신은 지쳤다. 이 남자 앞에서 얼마만큼 더 초라해져야 하는 걸까. 왜 화를 내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들쑤시고 괴롭혀도 말짱하던 남자의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이만큼의 간극이 벌어져 있었더라고, 네가 그렇게 바닥에서 헤매는 동안 남자는 이미 걸음을 떼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더라고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이미 차분한 사고보다는 감정이 더 깊이 뇌를 점령하는 타이밍이었다. 원래 그는 이성적으로 머리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대체 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니가 한 말이 생각이 안 난다고?”



“…내가 뭐 어쨌는데요.”



“몸에 대화라느니, 싫증난다느니, 갈아치운다느니…! 내가 왜 그따위 소리를 들어야 해!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겠는 신참 앞에서!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이 없어?!”



“…….”



“대체 어디서 그런 싸구려 같은 얘기를 입에 담아?!!”



…싸구려. 차마 고운 모래바닥에도 내려놓지 못하던 그 마음을 그가 대신 가치를 매겨주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얼어붙었던 모든 자제력이 일시에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억누르고 억눌러서 겨우 숨겨두었던 배신감이 저도 이곳에 있노라고 불씨를 지폈다.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요?”



산산이 부스러진 마음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속도로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음속으로만 맴돌던 비명이 언어가 되어 터지고 있었다. 



“그 남자가 사실은 나랑 자긴 자는데, 그게 내가 좋아서는 아니고 그냥 우리 누나가 좋아서라고 그렇게 말해? 사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잠만 자는 거라고 뭐 나만 미쳐서 달려드는 거라고 말할까요?”



“뭐….”



히지카타의 얼굴이 순간 납빛으로 굳는 것조차 오키타에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빙글빙글 돌아서 바닥과 하늘이 하나로 합체하는 기분이었다. 입은 더 이상 뇌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대체 내가 거기서 시답지 않은 말을 지껄이는 거 말고는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입 꾹 다물고 있지 않았다고 화내는 겁니까? 이젠 그냥 내가 말하는 것도 싫습니까? 나는 그냥 닥치고 있을까요?”



“너…, 지금, 그게 무슨.”



“내가 계속 당신 앞에 죄인이어야 합니까? 하긴, 싸구려 같은 놈이랑 몸이나 섞는데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어요. 그렇게 끔찍하면 없던 일로 해요! 책임져 달라고 안 합니다!”



숨 쉴 틈도 없이 표독함을 쏟아내던 오키타는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히지카타를 쏘아보았다. 아까부터 히지카타는 한 대 맞은 얼굴로 멍청하게 오키타를 보고만 있었다. 입이 몇 번 벙긋거리더니 이내 미간이 찌푸려진다.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을 오키타는 정확히 삼초 기다려줬다. 그리고 오키타는 잡고 있던 히지카타의 손을 털어내고 몸을 돌렸다. 지독하게 쏘아보던 시선이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가느다란 어깨는 분노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잘게 떨고 있었다. 



“잠깐만, 난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그 뒷모습이 둔영 밖으로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녀석을 뒤따라 온 히지카타는 오키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여린 팔목이 세게 잡히자 오키타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스무 걸음 남짓 만에 벌써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벌겋던 눈은 어느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힐끔 그를 돌아본 오키타는 차갑게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손을 뿌리치려 팔을 흔들었다.



“이해력이 그렇게 부족합니까? 그만하자고요. 잘못된 건 원래대로 돌려야 하니까 히지카타씨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말하는 겁니다.”



“그만 해? 이제 와서 네 마음대로 발을 빼겠다고? 이 망할 녀석이 진짜 오늘 핵폭탄 여러 개 던지네? 내가 대체 뭘 원한다는 거야.”



“질문 좀 그만합시다, 빌어먹을! 내 입으로 대체 뭘 듣고 싶은데?”



마음이 헤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싫다고 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발광을 하면서도 또 이렇게나 조각나 버리는 날에는 참기 힘들만큼 아프다는 것을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기라도 해보면 우린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바짝바짝 입은 말라가지만 오키타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단단히 버티고 섰다.



본인조차 이해시키지 못하는 얄팍한 핑계거리를 차마 그에게까지 들이밀 수가 없었다. 그간 살아온 인생은 언제나 거침없었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 할 수 없는 것들 갈 수 없는 길들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모조리 걸러내고 남은 선택지 중의 최상을 고르는 것. 하지만 남은 선택지라고 해봤자 고르고 말고 할 거리도 못되었다. 덧없이 생겨난 욕심들을 죽여 버리는 단순한 이야기일 뿐.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이제와 비겁하게 도망이라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오키타는 텅 비어버린 깡통처럼 마음이 찌그러지려는 걸 참지 않았다.



“너…!”



오키타가 남은 손으로 듣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귀를 막는 그 순간, 누군가가 히지카타의 어깨를 짚었다. 갑작스러운 제 3자의 난입에 두 사람의 시선이 별안간 히지카타의 뒤 쪽으로 꽂혔다.



“아…, 이 열렬한 반응. 부담스러운데?”



시선의 끝에는 곤도가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가 짧고 호탕하게 웃었다. 말로는 부담스럽다고 하면서도 한 사람씩 차분히 눈을 맞추더니 곤도는 아이의 손목을 부서져라 틀어쥔 히지카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어내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달래듯 하는 행동에 히지카타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곤도는 둘 사이에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반걸음씩 더 멀어진 둘 사이에 선 남자는 오키타를 등 뒤에 숨기고선 히지카타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왜 싸우는 거야 너희. 소고가 뭐 또 잘못했어?”



“아, 잠시만 곤도씨 우리 싸우는 거 아냐!”



히지카타는 다급하게 너머의 오키타를 붙들어보려 했지만 곤도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앞을 막아섰다. 꽤 여러 번이나 싸움을 말려본 능숙한 보호자의 솜씨였지만 적어도 히지카타에게 지금은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말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커다란 방어벽을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피해 봐도 넉넉한 웃음으로 앞을 가리고 든 곤도는 어지간하면 좀 봐주라며 히지카타의 어깨를 진정시켰다. 기다려줄 리가 없는 오키타는 당연하게도 다음 순간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증발해 있었다. 히지카타는 낮은 탄식을 쏟아내었다. 이마를 짚은 손에서 당혹스러움과 낭패감이 여과 없이 드리웠다.



“싸우는 거 아니라니까….”







* *

 






있잖아요, 대장님. 이건 좀.



아 왜 이불을 빌리는 것도 아니고 방 좀 빌리자는데.



그보다 좁지 않으세요? 안 그래도 4인실에 여섯이나 배정해 놓으셨으면서.



그거 내가 한 거 아냐. 히지카타씨가 했지.



1번대 숙소배정을 왜 부장님이 하셨어요?



하려고 보니까 이미 끝나 있더라고. 그 아저씨는 원래 날 잘 안 믿어.



소삭거리는 말소리는 좁은 방 안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맴돌았다. 네 명이서 쓰면 꽉 차는 방엔, 여섯도 모자라 이불을 짊어지고 쳐들어온 오키타를 포함해 일곱이서 다닥다닥 붙어 누워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잠자리를 준비하는 때에, 갑작스럽게 1번대 숙소의 맨 끝에 위치한 방문을 열어젖힌 오키타가 한 얘기라곤 ‘당분간 여기서 좀 자야겠다.’ 한 마디 뿐이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일단 밀고 들어오는 대장을 물릴 수 있는 평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당황스런 얼굴로 이유를 물었지만 오키타는 대답 없이 그저 한쪽 구석에 들고 온 이부자리를 묵묵히 까는 것에 집중했다.



두세 번 더 질문세례에 시달리던 오키타가 내놓은 ‘한 번만 더 묻는 놈은 내일 훈련 때 얼굴 기억해 놓는다.’는 으름장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던 것도 잠시, 그들은 금세 새로운 화젯거리로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한 마디씩 거들기도 하고 상관들 욕도 시원하게 늘어놓던 오키타는 머리맡에 놓인 등잔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것에 아직도 기름을 채워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그들처럼 다섯이나 더 있다면 아마도 그들 중 한명은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면서 황량하고 넓던 자신의 방을 떠올리니 싸늘함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서 그 곳은 제 멋대로 색을 바꿔 한층 더 어둡고 쓸쓸했다.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불 꺼진 방안에서 홀로 밤을 새게 될 것이었다. 덜컥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번 숙소배치 때는 누군가를 하나 붙여달라고 해볼까 싶다가도 결과적으로 그 얘기를 전해야 하는 사람이 떠오르기까지 이르자 상념이 꼬리를 자르듯 멈추어버렸다. 생각의 가동이 멈춤과 동시에 숨도 잠시 멈추었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며 오키타를 또 다시 외딴 곳으로 고립시키고 있었다.



히지카타가 제 방에 오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타인에게 방해받았다는 이유로 남은 화를 쏟아내려 굳이 늦은 시간 자신을 찾을 만큼 뒤끝이 긴 사람도 아니고 오늘처럼 곤도의 중재로 싸움이 종결되는 날에는 그는 항상 마지못해서 저를 용서하고는 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평소처럼 또 다시 잔소리와 말싸움을 주고받는 것이 언제나의 일상.



이번에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키타는 굳이 도망쳤다. 자신을 찾는 히지카타를 피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어느 결엔가 이렇게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마저 두려웠다. 점점 마음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는 건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납득하고 싶지 않아서 오키타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밤이 한 번 지나면 이 기분이 희석될 수 있을까. 아니면 두 번, 세 번, 네 번…



혹은 그보다 많은 밤이 지나도 여전히 당신이 무서우면 어떡하나….



끝이 없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서도 그 끝을 바라는 것처럼 마음을 닳게 하는 일은 없었다. 뾰족한 끝을 마모하듯이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다시는 열릴 일이 없는 문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그것이 둥글게 변하는 날에는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도록 지치지도 않는 헛된 욕망의 모서리를 다듬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얼마나 굴렸을까. 주변의 이야기소리들도 하나 둘 줄어들더니 어느새 다들 잠에 빠져들었는지 방안은 적막이 흘렀다. 그 숨소리가 섞인 고요함이 오키타는 제 방에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 느껴졌다. 마음이 한결 느슨해지는 것 같아서, 천천히 오키타도 그들을 따라 쓸모없는 시름을 내려놓았다.



느리게 의식의 흐름이 물 밑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들어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우습지만 사람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온기들이 편안하게 그를 수면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아주 얼핏 그 남자가 안 되면 곤도에게 찾아가서 방 배정을 새로 해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키타는 웃었다. 아무나 저보다 더 세심하게 등불을 챙겨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붙여달라고 해야겠다. 오늘 그 자식은 어떨까. …얼굴 볼 때마다 히지카타 생각나서 안 되겠지.



빠른 수긍 끝에 대강 기억나는 1번대 대원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흘려보내는 그 즈음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오키타의 입을 확 틀어쥠과 동시에 잠에 빠져들던 눈이 번쩍 떠졌다. 어둠속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뒷골을 자르르하게 울리는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오키타의 주먹이 상대방의 턱 끝을 향해 휘둘러졌다.



갑작스러운 공격도 가볍게 한 팔로 흘려보낸 남자는 남은 한쪽 팔로 오키타의 허리를 감싸더니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조심성 없이 방을 나선 뒤 대강 문을 발로 닫아버렸다. 달빛에 비치는 인영을 보기 전이라도 알싸한 담배냄새가 코끝으로 들이닥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키타는 금방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속에서 닳고 닳아 없애기 위해 노력하던 그 남자였다.



또 다시 지우고 싶은 불길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그 어깨에 떠메어진 오키타는 내려가고자 발버둥을 쳤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몸을 뒤흔드는 통에 남자의 등이 여러 번 걷어차였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도 않는다는 그는 거침없이 가던 걸음만 재촉했다. 입을 가린 손가락을 세게 깨물어 봐도 남자는 얌전히 있어, 한마디만 남기고 묵묵히 오키타를 짊어진 손을 풀지 않았다.



쾅.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히지카타의 방이었다. 오키타가 숨어들어간 곳은 신센구미의 숙소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던 방이었기 때문에 우연이라도 히지카타가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고작 신경 좀 긁었다고 신센구미의 그 넓은 둔영을 다 돌아다니며 설마 저를 찾아다니는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오키타였기에 이렇게  그의 손에 붙들려 오는 것은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모양 빠지게 하나하나 대원들의 숙소를 뒤지고 다닐 사람이 아닌데. 오키타는 아직도 어떻게 히지카타가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영문을 몰랐다. 얼떨떨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벽으로 밀어붙여진 오키타는 어느새 히지카타의 양 팔 사이에 갇혀서 그와 마주보고 서있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마주한 사내에게서 흘러넘쳤다.



“너 찾느라 애 좀 먹었다, 소고.”



“……왜요?”



“방에 가봤더니 불도 꺼져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도 않고. 결국에는 이상한데 숨어 있질 않나. 뭐하자는 거야?”



“나는 지금…. 날 왜 찾았냐는 걸 묻는 겁니다.”



“이걸 진짜. 때릴 데도 없고.”



히지카타는 신경질적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번뜩이는 눈이 오키타와 마주치자 그대로 달려들어 오키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배 속에서부터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자꾸만 몸을 밀어붙이는 통에 등이 벽과 종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숨이 가빠져오는 동안 머리도 함께 언덕을 구른 듯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코앞에서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그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길었다. 이마가 가볍게 맞닿았다.



“소고. 네가 지금 날 얼마나 물 먹이는지 알고 있어? 그래 알 리가 없지……. 알면 나한테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가 없어. 네가 감히, 대용품이니 뭐니 그런 소릴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안 그래?”



이를 악문 히지카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참고 있는 듯, 이를 악문 그는 양 손으로 오키타의 얼굴을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았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마주 본 히지카타는 복잡하고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대체 뭐가 든 거냐 이 안에는. 어디가 어떻게 망가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고…. 너 대체 얼마나 날 더 우습게 만들어야겠어?”



“…….”



내가요? 얼빠진 물음은 아주 뒤늦은 타이밍에야 남자에게 가서 닿았다. 참고 참았던 마음을 폭발시키듯 그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아. 널 대체 누구로 착각 한다는 거야! 너같이 날 잡아 죽이려는 눈빛을 하고 있는 녀석을 대체 어떻게 헷갈려! 내가 돌았냐! 시궁창에 뇌를 저당 잡히기라도 한 것 같아? 세상에… 대체 세상 천지에 누가 널 대신할 수가 있어!”



“…….”



“이렇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 이렇게 오래 누굴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렇게까지 무서운 짓을 할 수 있는 거냐, 너는…?”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던 히지카타가 천천히 오키타의 어깨로 고개를 떨궜다. 음울하고 낮은 음성은 애끓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그저 히지카타가 불안정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오키타는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무너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생소했다. 느리게, 더도 없이 느리게, 머리는 사고를 시작했다. 왈칵 울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게 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제야 겨우 가졌다고, 이제야 겨우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더니 대체 너는 왜… 혼자 달아나고 있어.”



온 세상의 소음이 모두 들이 닥쳤다가 일순간 빠져나가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웅웅거리며 히지카타의 목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로지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감각인 것만 같았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바닥으로 그의 까만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려 해봐도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오키타는 남자에게 속삭였다.



“거짓말 같아서…. 한 번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러니까…….”



어깨에 파묻힌 그의 뺨이 축축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누나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정말 내가 맞아요?”



“제발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정말 무서운 거 알아? 당연히 내건 줄만 알았던 애한테 이렇게 뒤통수를 맞아야겠어? 날 얼마나 망가뜨릴 셈이야….”



“…히지카타씨. 제정신이죠?”



“제정신 아닌 건 너야. 차라리 말을 하지. 넌 대체 왜, 말도 안하고.”



“그야…. 그야 매일 잠든 사람 앞에 두고 한숨을 그렇게 내쉬는데 내가 어떻게…. 내가 대체 어떻게…. 어떤 기분으로….”



“소고….”



“……내가 맞아요? 여태 나였어요?”



길고 공허한 나의 밤에 그가 찾아왔다. 밟히고 밟혀서 볼품없이 뭉그러진 마음에서 진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지옥 불에 끓어오르는 상처 같았다.



“한 번도 아니었던 적 없어…. 한 번도. 단 한순간도.”



“…….”



“나한테는 네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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