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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 눈

#이사 2017. 2. 5. 03:02


“…돌아가서 조지면 되는 사람을 말해 봐요.”



“…몰라.” 



“빼지 말고 딱 한 명만 찍어 보라니까요? 혹시나 내가 뻗치는 성질을 주체하지 못해서 죄 없는 부장님 집무실을 난도질해버리면 어떡해요.”



“야마자키 사가루.” 



히지카타는 단박에 부하대원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자신의 방이 더 소중했다. 어차피 귀책사유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니 오키타의 분풀이를 받는다고 해서 억울하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지은 죄에 비해 너무 과도한 앙갚음일지라도. 



“히지카타씨가 너무 일정가지고 쪼아대니 이런 일이 생기잖아요.” 



오키타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재킷을 벗어 대충 문고리에 걸었다. 저런 식으로 아무 튀어나온 곳에다 겉옷을 벗어두는 습관덕분에 녀석의 방이 그 모양 그 꼴이었다. 히지카타는 혀를 차며 잔소리대신 옷걸이를 집어 들었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습득했다. 



“일정을 빠듯하게 줬다고 숙소를 이렇게 잡는 건 어디서 배워먹을 버릇이래냐.” 



“그러게요. 감찰반 기강 담당하는 인간도 한 번 털어볼까요? 대체 얼마나 애들을 설렁설렁 관리했으면 사람을 둘씩이나 내려 보내놓고 이런 유아용 침대 하나밖에 없는 방을 예약했는지.” 



“누구네 집 유아가 사이즈가 성인 남성만 하냐.”



히지카타는 오키타의 비약을 바로잡으며 재킷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흙바닥을 구르다 온 탓에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다. 일단 씻고 싶어서 단추를 푸는 사이 똑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게 분명할 녀석이 침대로 몸을 던지는 게 보였다.



“생떼 같은 히지카타씨 자식이 딱 이 사이즈네요. 안 그래요 아빠?”



“야. 지저분한 얼굴로 잠자리에 눕지 말고.”



오키타는 잽싸게 하나뿐인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웃기라도 했으면 얄밉기라도 할 텐데 녀석은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로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세요. 이 겨울에 히지카타씨를 맨바닥에서 재운 죄는 내가 에도로 돌아가면 반드시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야마자키는 물론 그 책임자까지 먼지 나게 털어준다고 약속할게요. 원래 밑에 것들이 잘못하면 윗사람이 대신 책임지는 거 아니겠어요?”



눈빛이 살벌한 꼴을 보니 말투는 가벼울지언정 속내까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돌아가면 예약 실수를 한 야마자키를 포함해서 저까지 빈틈없이 닦아세울 의지가 가득했다. 히지카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옷을 벗다말고 침대로 다가갔다.



“누굴 맘대로 바닥에 재워. 하여간에 애가 위아래가 없어.”



“그럼 내가 내려가요? 히지카타씨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네요. 난 말이죠. 매트리스 백 개 아래에 놓인 완두콩 한 쪽에도 허리가 배기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태어났거든요? 인생역전을 시켜줄 왕자님을 기다려야 되니까 지금 이상으로 잠자리에 무뎌질 수 없답니다. 아시겠습니까.”



동화 속 공주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호호호 웃는 녀석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와 바닥을 구르며 우주 괴생물체를 잡았던 인간이었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단도를 단칼에 깨부수며 야차처럼 웃던 인간이 지금은 또 말끔한 낯으로 비슷하지도 않은 공주님 행세였다. 히지카타는 녀석의 몸 위로 가로로 털썩 드러누웠다. 어정쩡하게 머리를 받친 녀석은 미간을 구겼다. 같이 자기엔 너무 좁거든요?



“빈틈없이 붙으면 되잖아.” 



“징그럽게.”



“그러다 꼴리면 더 징그러운 짓도 하고.”



“…내가 꺼질게요.”



도망가려는 오키타의 몸통을 짓누르며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말로는 질색을 하면서도 그렇게 만만한 스케줄이 아니었던 탓인지 오키타는 짧은 반항의 시늉을 마치고 도로 침대위에 얼굴을 묻었다. 얌전히 등을 내어주고 엎드린 녀석이 깊은 숨을 내쉬는 게 맞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숨의 들락거림이 만들어내는 작은 진동이 부드럽게 머리로 전해지는 것이 간지러웠다. 눈을 감으니 아주 작게 녀석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때 아닌 평화가 어울리지도 않게 지금 이 순간 머리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귓가에 내려앉는 오키타의 목소리가 당치 않게도 다정한 색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 그만 꺼지지 않으면 바닥 말고 바깥에서 자게 될지도 몰라요.”

물론 정작 녀석의 용건은 이따위였지만.



“밖에서 못 자.”



녀석은 왜? 되물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침대에 조금 더 늦게 누웠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창밖의 광경을 떠올리며 그는 말했다.



“눈 와.”



그러자 오키타는 본격적으로 히지카타의 머리를 떨쳐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작 지금의 날씨 따위의 하찮은 정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선 믿지 않는 인간답게 녀석은 침대헤드 위로 난 창문을 열어젖혔다. 찬바람과 함께 싸락눈이 어둠을 뚫고 내리고 있었다.



“진짜네……. 하여간 히지카타씨랑 같이 움직이면 재수가 없다니까.”



“그럼 혼자 오던가.”



“말만 하지 말고 혼자 보내던가.”



어차피 입으로만 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은 한 마디도 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히지카타는 본전도 찾지 못하고 픽 웃을 따름이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싸락눈을 예쁘다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는 주제에 오키타는 오래도록 창문을 열어둔 채 바깥을 응시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가로등 불빛을 빌어서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눈송이는 피부에 닿기만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정도로 가늘었다. 바깥으로 뻗은 녀석의 손목에는 이미 녹아버린 물방울들이 잔뜩 맺혀있었다.



히지카타는 조금 더 침대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오키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힘주어 끌어당기자, 뭐하는 짓이냐는 말이 혀가 아니라 마주친 눈동자를 통해 전해졌다.



“그 날 생각난다.”



히지카타는 시선을 떨쳐내듯 턱을 녀석의 다리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부슈에 있을 때… 딱 한 번 폭설이 내렸던 적 있잖아. 한 밤중에 지붕이 무너졌다고 미츠바가 네 손을 붙잡고 곤도씨 도장으로 찾아왔었지.”



“…아.”



오키타는 기억을 하는지 마는지 애매한 태도로 대답했다.



“남은 방이 없어서 내가 쓰던 곳을 미츠바에게 내주고 둘이 부엌에서 잠들었던 거 기억해? 이불도 한 채밖에 없고 날씨는 너무 추운데 넌 자꾸만 이불 밖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아침에 깨보면 죽어 있진 않을까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럼 나한테 이부자리를 양보하고 얼어 죽지 그랬어요. 깔끔하게 뒤처리도 해줬을 텐데.”



부러 미운 소리를 뱉으면서도 오키타는 창문을 닫았다. 귓가를 적시던 차가운 바람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녀석의 손등이 얼굴 근처를 스치는 짧은 사이, 잔뜩 묻어있던 물기가 눈두덩이며 뺨으로 묻어가는 걸 느끼며 히지카타는 조금 더 녀석을 끌어당겼다. 얼음장 같은 손이 목덜미를 배회하다 느리게 등을 마주 안았다.



“누구랑 같이 자본 건 나도 그때가 처음이었어.”



히지카타는 옅게 웃으며 당시의 차갑던 바닥을 떠올렸다. 쉼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와 창문을 타고 기어오르는 냉기 그리고 바로 옆자리 어린애의 뜨거운 체온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같은 땅에서 자라긴 했어도 한 이불을 쓴 건 그 때가 유일했다. 유별나게 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녀석에겐 견딜 수 없는 날 기어들어갈 다른 이의 품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제 아무리 가까이서 자라봤자 그들은 피차 가족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게 슬프지 않았다. 곤도와 녀석에게 가족의 정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던 믿음에 대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곧 죽어도 얼굴을 보는 건 싫었는지 등을 돌린 채 제 옆에 누운 아이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아주 오래도록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더랬다. 눈은 너무 느려서 소리가 없는 줄 알았는데, 폭설은 장마처럼 시끄럽기도 하더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보람도 없이 미츠바가 앓아누워서 너한테 온갖 구박을 다 들었었지.”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면 녀석은 천천히 등을 토닥이곤 했다. 좁은 침대에 함께 구겨져서 살을 맞댄 채로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껴안는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뺨을 가까이한다. 한 번도 저에게 내준 적 없는 상냥함은 마치 누나의 대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했다. 미츠바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눈에 띄게 온순해져서는 마치 위로라도 하듯이 살을 내어주는 게 그녀를 떠나보낸 이후의 버릇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가증스런 온기라도 필요하면 부러 오래전의 기억을 뒤적이곤 했다. 어디서 망가졌는지 모를 너의 동정심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그렇다고 해도 마음속에 바라지 않고 남아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오로지 너일 뿐이라서… 저는 마치 사기꾼처럼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과거의 너를 끌어올려 티 나지 않게 가지를 치고 마치 추억하듯 그녀를 곁들이는 것이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유일한 이를 찾아들어 옆자리로 파고들면 녀석은 우는 것처럼 고요하게 곁을 허락했다.



두 사람이 함께 올라서긴 비좁은 침대 위에 얽혀서 듣는 심장박동은 그때의 폭설이 내는 소리와 닮아있었다.



“히지카타씨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눈을 뜨자 녀석이 제법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그 시절의 어린애로 보입니까?”



“…….”



방금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어느새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녀석은 흉흉하게 속삭였다.



“무너진 서까래를 손도 쓰지 못하고 막막하게 올려다보는 그날의 어린이가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지질 않아서, 이런 귀여운 수작질인 겁니까?”



“그럴 리가.”



어차피 넘어가주지도 않잖느냐, 대답하려는 것보다도 오키타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칼을 끌어당기는 쪽이 빨랐다.



“어떻게 해야… 당신이 그 빌어먹을 애송이가 자랄 만큼 자랐다고 생각해줄 건지 난 참 모르겠네요.”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웃음과 함께 천천히 가까워지는 뜨거운 날숨을 삼키며 히지카타는 팽팽하게 당겨진 인내를 놓았다. 그들의 입맞춤에는 늘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고, 대부분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눈이 내렸고 침대가 하나뿐인 탓이었다.











  • 오키른 전력 계정이 생긴걸 보고 첫 주제 정도는 참가해봐야지 라고 생각했으나 무려 일주일을 늦어버림^_^; 부끄러워서 트위터에 태그는 못하고 티스토리에만 슬그머니 올려봅니다. 소재는 리델님께서 아마 굉장히 오래 전에 주셨던 걸 이어서 써봤습니다ㅇㅅㅇ)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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