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히지오키] 7월9일

#이사 2017. 7. 2. 15:07



지독한 숙취가 잠을 깨웠다. 식도를 태우는 갈증과 머리를 쪼개는 두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인간의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없을 만치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린 건, 축축한 이불과 울렁거리는 위장 때문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건 필시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술을 들이 부은 상태였다. 어제 대체 얼마나 달린 거지? 최소한 반나절 이상 컨디션이 좋지 않으리란 것을 남자는 직감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구겨지고 젖은 이부자리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 습해. 너무 끈적거려. 머릿속에서 불평들이 아우성쳤다. 대체 어디서 오는 불쾌감인지 알 길이 없어서 히지카타는 다소 짜증스럽게 제멋대로 뻗친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미세하게 밝아진 시야에 널려있는 옷가지들과 바닥에서 뒤엉킨 서류들의 무덤이 들어왔다. 히지카타는 멍하게 이게 무슨 일일까 생각해보았다. 몸 상태가 최악인 것은 그렇다 쳐도 방구석 꼴이 이렇게까지 기막힐 이유가 없었다. 책상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어야 할 물건들이 전부 바닥에 늘어져있었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집기들을 굴린 기억이 없는데. 술 마시고 방 안을 뒤집는 주사라도 새로 생겼나.



별 신빙성 없는 가설을 세우며 그는 몸을 뒤척이다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그곳엔 낯선 기상 풍경 중에서 최고로 낯선 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기운이 공기 중으로 분해되며 어젯밤 퍼부어진 알콜과 함께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히지카타는 제 입을 황급하게 손으로 막았다.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숙소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을지도 몰랐다. 미처 밖으로 터지지 못한 비명이 입안에서 저들끼리 몸서리쳤다. 조금 전까지 매달려 있던 천근짜리 추는 충격과 함께 달아났는지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이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저기… 그러니까 이건… 몰래카메라…?



소리가 되지 못한 물음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의 옆에는 늘 보던 재수 없고 한 번쯤 때려보고 싶었던 뒤통수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뭣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히지카타는 일시 정지 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녀석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울혈과 잇자국들이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접니까? 저인 겁니까…?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말짱한 천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느끼며 히지카타는 헛숨을 들이켰다. 무턱대고 부정하기엔 정황증거가 너무 명확해서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서 손자국을 진하게 단 어깻죽지가 잘게 흔들렸다.



이건 말하자면, 교묘한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제가 한 짓이 맞는 것도 곤란했지만 다른 사람의 흔적이었더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몹시 곤란했던 것이다. 정체모를 인간이 녀석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는 장면을 상상한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저의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조심스럽게 히지카타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틀렸다. 만약 저것이 타인의 흔적이라면 자신은 참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흔적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쪽은 괜찮느냐하면… 진퇴양난이었다.



그들이 정말 간밤에 일을 치렀다면 각오해야 하는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다 제쳐두고 무엇보다 이 사태의 원인파악이 시급했다. 히지카타는 더듬더듬 간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는 녀석의 생일이었다. 그것도 스무 번째.



아이가 드디어 성년이 되는 해라며 곤도는 필요이상으로 감격하며 술판을 벌렸다. 이미 미성년자일 때부터 술도 마시고, 업소까지 출입해본 녀석인데 그깟 스무 번째 생일이 뭐가 특별하냐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과음했던 장면까지 히지카타는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된 영사기를 돌리듯 기억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술판은 점점 커졌고, 취객이 늘어 갈수록 경계는 점점 허물어졌다. 다들 떠들썩한 분위기에 취하고 도수 높은 알콜에 취해서 누구 하나 사라져도 모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등 뒤에서 ‘대체 얼마나 퍼마실 생각입니까’ 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쉬지 않고 위장으로 술을 밀어 넣고 있었다.



아이가 잔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먼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히지카타는 생일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한 마디조차 건네지 않은 채 은근슬쩍 그를 피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앉은 녀석을 본 순간 막아둔 댐이 터지듯 한 점에 집결해있던 취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마 머리가 녀석의 어깨로 툭 하고 꺼졌던 것도 같은데 확실치는 않았다.



오키타는 잠시 멈칫하였다가 이내 손가락 끝으로 히지카타의 머리를 톡톡 밀어내었다. 그래도 그가 목을 가누지 못하자 녀석은 결국 곤도에게 이 사람 좀 방에 처박아 놓고 오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이미 사람 분간을 못할 정도로 취한 건 마찬가지였던 곤도가 제대로 그 말에 대답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오키타는 그렇게 늘어진 히지카타를 부축해서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직 열대야가 찾아오지 않은 초여름 밤은 꽤 서늘했지만 자신보다 한참 더 큰 성인 남자를 붙들고서 걸음을 옮기는 오키타에겐 충분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배는 더 걸려서야 그의 방 앞에 다다른 아이는 숨을 몰아쉬며 더운 땀을 닦아내었다. 오키타는 마루에 내동댕이친 히지카타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쉽게 본래의 빛깔로 돌아오지 못하는 몽롱한 시선과 마주한 녀석은 주인공보다 더 많이 마시니까 좋으냐며 싱거운 어조로 타박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오늘따라 멀쩡하냐?’



스스로가 어느 정도로 취했는지 모르던 히지카타는 흘러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입에 담았다. 하지만 일단 말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싸한 의문이었다. 녀석에게 생일이란 곧 제지하는 사람 없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는 날과 동의어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예년과 달리 올해의 녀석은 묘하게 의젓한 척을 하고 있었다. 술기운에 흐릿해진 오키타의 실루엣이 평소에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르게 느껴졌다. 시시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키타는 아주 약간 고개를 기울이더니 픽 웃었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도 주변에서 성년이다, 어른이다 강조를 해대니 오늘 하루쯤은 기대에 부응 해줘볼까 싶어서요.’



마치 선심 쓰듯이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이는 정말 어제보다 조금 자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무 살…. 스무 살이라. 생각만으로도 그 단어의 무게는 엄청났다. 



취기일까, 히지카타는 그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새삼스럽지만 녀석과 함께해왔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으로 신센구미 제복을 걸치던 때만 해도 한 해에 몇 번씩이나 옷을 새로 맞추던 아이는 언제부턴가 제복을 더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멀쩡하던 옷을 기장 때문에 버리는 일도 더는 없어진 것이다. 여전히 그보다 작고 왜소해 보이긴 했지만 그건 녀석이 덜 자라서가 아니라 원래 체구가 작기 때문이라는 걸 히지카타는 알고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다. 그렇게라도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에게 숨기고 싶었다. 그냥 언제까지고 녀석에게 닿을 수 없는 소망만을 품고 사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눈을 바라보면서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정말, 이렇게 작고 요만하던 꼬마일 때부터 지켜봐 왔었는데…. 대강 허리께쯤을 손으로 그리며 히지카타는 중얼거렸다. 호선을 그리는 녀석의 눈꼬리가 달큼하게 웃었다. ‘언제 적 얘길 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히지카타씨가 지금이랑 비교도 안될 만큼 젊고 팔팔할 때부터 지켜봤었거든요?’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히지카타는 애매한 표정으로 웃으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 그 팔팔하던 청년이 이만큼 늙는 동안 너무 잘 커줬다. 모두가 가장 젊었던 시절을 지나 늙어가는 와중에도 끝없이 자라나는 너는, 욕심이 날만큼 사랑스러워.



말하는 대신 히지카타는 허리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 하고 어깨를 뒤로 빼던 녀석은 끈질기게 입구를 두드리는 그에게 천천히 침입을 허가했다. 맞닿은 건 타인의 살덩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한테서 느껴지는 술 냄새가 머리를 점령했다. 점막끼리 부딪히는 생경한 느낌이 심지에 불을 당겼다. 비상벨이 깜빡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가지기 전까지는 영원히 식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열망에 불이 붙은 건, 술의 탓일 수도 있었고 혹은 저변에 깔린 저의 안일함 탓일 수도 있었다.



‘아예 뻗어버릴 생각으로 마신 건데….’



히지카타는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술을 마신 의미가 없었다.



‘괜히 정신만 사나워질 뿐이잖아.’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오키타를 제 방으로 끌고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꼭지가 빠졌는지 영상이 드문드문 끊겨있었다. 갑작스럽게 끌어당겨진 녀석이 반항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서류뭉치가 가지런히 모아져 있던 탁자 위를 성의 없이 대강 발로 쓸어버리고 그 위로 아이를 눕혔던 것 밖에는. 



아마도 열려져 있던 잉크병이 추락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은 건 오키타였을 것이다. 하마터면 쏟을 뻔했지 않느냐는 다급한 목소리가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몇 번이나 제 이름을 부르던 녀석의 당황스런 표정이 탈탈 털어낸 기억의 잔여물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히지카타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한 방에 넉 다운 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취해버린 간밤의 저를 바다 한가운데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신의 농간임이 분명했다. 히지카타는 녀석이 깨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여름용으로 몇 년 전 곤도씨와 함께 가서 맞추고 왔다던 오키타의 푸른색 유카타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줄곧 막냇동생 같던 녀석의 얼굴을 앞에 두고 불순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건.



분명 처음엔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다. 평생 일방통행만 하리라 단념했던 마음이 맞부딪혀 소리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행복했었다. 자신의 몫이 아닌 행복을 가진 게 아닐까 무서워할 만큼.



어딜 나서면 자연스럽게 그곳이 자신의 자리인양 따라붙는 아이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부서지기 쉬운 것을 매만지듯 가끔 녀석에게 입 맞추는 것만으로도, 그는 허용치 이상의 것을 가진 양 무서웠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녀석이 한참을 헤매다 자신의 이불로 꾸물거리며 들어왔을 때도 그저 안타까움만으로 마음을 끓이던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 퇴색되었던 것인지는 그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오키타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엉망으로 울고 있었다. 본능만이 남은 얼굴을 하고 다른 이의 손을 타고 있던 녀석을 보는 날엔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몹시 초조해졌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굴다가도 문득 녀석이 입을 다무는 순간만 생기면 여지없이 난잡한 상상이 그를 쫓아왔다.



처음에는 손톱만 하던 이상 징후가 해를 거듭함에 따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갈증이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이성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오랜 갈망에 지친 마음은 몇 십번도 더 얼었다 녹아 바람이 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구멍 뚫린 뼛조각처럼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러져버릴 만큼 이성이 쇠약해져서야, 히지카타는 인정했다. 마치 저에게 있어 녀석의 존재는 뜨거운 열망 같았다.



손대면 화상이라도 입어버릴까 그는 두터운 자물쇠를 둘렀다.



아직 너무 어려. 미성년자잖아.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 주제에 입에 발린 거짓말로 잘도 그 난폭한 본능을 잠재웠다. 잠재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손쉽게 변할 수 있는 헐렁한 자물쇠 하나만을 믿고서 안일하게 굴었던 대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춰둔 욕망을 부추겼다. 기간이 다한 걸쇠는 없느니만 못한 허들이 되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어리지 않지 않느냐고. 궤변이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다고 해서 아이가 별안간 어른이 되어 버린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조각조각 난 기억의 편린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를 탁상에 엎어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한 손으로 누르는 모습과 녀석의 입안으로 무자비하게 손가락을 쑤셔 넣던 모습, 제 허리 짓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아이의 등을 따라 송곳니를 세우는 모습. 어느 것 하나 다정한 게 없었다. 하다못해 아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보니 이제는 스스로의 자책마저도 알량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냥 저는 참고 참았던 욕망이 터질만한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서라도 녀석을 무너뜨리고 싶었던 제 이기심인 것이다. 녀석의 스무 번째 생일은 그렇게 이용당했다. 죄책감에 고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으….”



뒤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오키타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히지카타는 움찔거리는 어깨를 애써 진정시키며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뒤늦게 낮은 신음소리는 얼핏 들어도 기괴해서 난장판이 된 목상태를 짐작케 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다다미 위로 떨어지는 게 자신의 땀일지도 몰랐다. 1분이 마치 1년 같았다. 히지카타는 제발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누가 좀 꺼내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불행한 가정들이 휘몰아치는 동안,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게 아마도 녀석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그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무서워.’



처음 키스했던 날도 그랬다. 그날에는 정말로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던 날이었다. 그간 쌓아왔던 모든 게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고만 생각했다. 욕심내던 것이 없어 자연히 두려울 것도 하나 없던 그에게 녀석은 마치 온갖 무서운 것들로만 뭉쳐진 사신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마주칠만한 상황을 마냥 피해 다니기만 하던 자신과 달리 오키타는 그러지 않았다.



방안에 틀어박힌 그를 찾아와 문짝을 거의 부수다시피 날려버린 녀석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멱살을 틀어쥐고 이번엔 제 쪽에서 입술을 먼저 부딪쳐 왔다. 얼마나 세게 박았던지 이빨이 서로 부딪혀 딱 소리를 냈지만 녀석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폭력 같기도 한 입맞춤이 끝나고 오키타는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이걸로 그 전날의 빚은 갚았노라고. 이빨에 부딪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술을 하고서도 거침없이 아이는 말했다. 이젠 피차 같은 처지가 됐으니, 괜히 사람 기분 나쁘게 피해 다니지 말라던 녀석은 키스가 아니라 주먹질이라도 한 뒤의 소년처럼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히지카타씨….”



“…….”



마치 판사의 선고만을 기다리는 피고인이 된 기분이었다. 답지 않게 녀석의 목소리는 몹시 느렸다. 거칠게 갈라진 목을 몇 번이고 가다듬으며 오키타는 쇳소리를 느리게 뱉었다.



“…물. 마실래요.”



“어! 내가! 그, 내가 갈게!”



히지카타는 단비를 만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차마 오키타 쪽으로는 시선조차 두지 못한 채로 그는 주섬주섬 탁상 근처에 널려져 있던 유카타를 집어 들었다. 반가운 축객령을 받들어 황급하게 옷을 뒤집어 쓴 그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꽂은 채로 집게걸음을 걸어 방을 빠져나왔다. 발바닥에 닿는 다다미가 끈적거렸다. 쿵, 소리를 내며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참아왔던 숨이 한 순간에 터져 나왔다.



방 구석구석이 온통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엎어진 탁자와 그 위에 억류된 오키타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지나갔다. 무자비하게 녀석의 팔을 뒤로 꺾어서 내리눌렀던 기억이 있었다. 반항을 했었던가? 히지카타는 이마를 짚었다. 이제 머리의 통증이 숙취 때문인지 아니면 자책감 때문인지도 구분가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를 덮은 탓에 소맷부리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팔꿈치에 걸려있던 옷자락이 이상하게 축축했다. 설마 정액이라도 묻은 건가 싶어서 황급하게 펼쳐 보인 소맷자락은 물에 담갔다 꺼낸 듯 넓게 젖어있었다. 일단 점액질은 아닌 것 같았지만 히지카타는 팔을 들어 올려 시야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가물가물 끊어진 필름을 뒤적거리자, 사진이 인화되듯 느리게 필름이 다시 한 번 재생되었다.



‘히지카타씨… 히지카타씨….’



녀석은 여전히 하체만 남의 손에 들린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자꾸만 허물어지는 아이의 허리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팔로 지탱하고 있긴 했지만 그조차 자꾸만 미끄러져 녀석의 뺨이 어딘가로 처박혔다. 부들거리는 손마디가 붙들고 있는 건 바닥에 깔린 이불이 아닌 히지카타가 벗어둔 옷자락이었다. 검은색 유카타가 녀석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졌고, 녀석은… 구원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붙들었다. 파묻힌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그 애잔하던 울음에 섞인 저의 이름에 아마도 흥분을 했겠지. 그렇게 밤낮으로 녀석을 가득 채우고 싶어 했으니까 오죽 기뻤을까. 그리고 그 환희를 폭력으로 받아내던 오키타는 얼마나 아팠을까. 히지카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간밤에 녀석이 저를 마구 때리고 할퀴고 욕설을 퍼부었더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제발 녀석이 당한 것의 일부만이라도 돌려줬기를. 애먼 바람이 히지카타를 휩쓸었다. 그 상황에서도 녀석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상대는 자신이었다. 그 처지가 비참했다. 차마 다른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고작 옷자락이나 붙들고 눈물을 쏟아내면서 녀석은 자신을 감내하였는데. 과연 녀석은 무슨 끝을 바라고 있었을까.



낯부끄러운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하는 것인가 걱정하기보단,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먼저였다. 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고, 술에 취한 채 실수로 그런 것은 아니었노라고, 취객을 상대하게 해서 면목이 없다고.



히지카타는 채 다섯 걸음도 옮기지 못한 발을 돌려 다시금 문 앞으로 돌아갔다. 안에 들어있는 게 지옥과 같은 얼굴이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했다. 문고리를 잡는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끌어당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소고-.”



그리고 이름을 부르며 활짝 열린 문 안에는, 믿기지 않게도 텅 빈 이부자리만이 남아있었다. 








* *







“윽!”



오키타는 잡고 있던 기왓장을 놓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픈 곳을 바닥에 패대기쳤으니 그 고통은 소리도 되지 못한 채 머리를 짓눌렀다.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다른 손은 바닥을 연신 쾅쾅 두들겼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벌써 세 번째 담장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디딤 발도 제대로 딛었고 손을 짚는 위치도 한 치의 틀림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위를 훌쩍 뛰어오르는 게 도무지 불가능했다. 저의 턱에 조금 못 미칠 만큼 낮은 담장이었기에 평소라면 도움닫기 없이도 수시로 오르내리던 곳이었다.



기왓장을 붙들고 지면을 박찰 때마다 번번이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런데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오키타는 들리지 않게 괴성을 내질렀다.



사실 이유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뛰기 직전 허리의 중심이동이 잘 되지 않았다. 기왓장을 놓치는 건 지면을 박차는 반동을 타고 몸이 가뿐하게 오르지 못하는 탓이었다. 한 바탕 바닥에서 발버둥을 치고 나니 그새 기운이 달려서 오키타는 담장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땡땡이를 칠 때 늘 넘어 다니던 담장이었다. 몸도 마뜩치 않고 정신상태 역시 평화롭지 않으니 오늘 근무까지 서라고 하면 애꿎은 애들 여럿 잡겠거니 싶었기 때문에 얌전히 도주해주려 했던 것인데. 맘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하긴, 언제라고 제 맘대로 따라주는 게 하나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자조석인 웃음을 비슬비슬 흘리며 오키타는 서늘한 담장에 몸을 맡겼다.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던 통증이 개미떼처럼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머리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잡념들을 떨쳐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오키타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만을 가려주는 그늘 아래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것 하나 꼽을 것 없이 현재 처한 상황 전부가 짜증스러웠다.



담을 넘을 생각으로 숙소 뒤편으로 나온 탓에 도로 정문까지 가려면 그 넓은 신센구미 둔영을 가로질러가야 했다. 남들 보기에 몹시 이상한 걸음걸이로.



오키타는 울컥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분을 오만상과 함께 삼켰다. 들어줄 상대를 다른 곳에 두고서야 아무리 허공에 내뱉어 봤자 전혀 시원해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 분노를 남자에게 쏟아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신사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저에게서 한 걸음 멀어질 게 뻔했으니까. 항상 죽을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가는 건 오키타의 몫이었다. 어쩌다 남자가 뒤돌아보기라도 하는 날엔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를 보며 겁내고 있다는 것을 아이는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주춤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항상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달려갔는데도 그들 사이의 간극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 사람이 종종 보이는 거리감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솔직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방어벽이었다. 히지카타처럼 고지식하고 요령 없는 남자가 이런 관계, 두려워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얽히지 않은 사이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엮여있는 사이가 더 무거울 수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한 번도 브레이크 없이 마음가는대로 페달을 밟은 적 없다는 것도, 전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늘 그가 멈칫할 때마다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제가 더 아쉬우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치 챈 건 그 무엇도 없는 척 그가 내비치는 두려움을 발밑에 깔고 비굴하게 웃으며 애정을 구걸했다. 난 아직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니 괜찮다고. 조금만 더 사랑해달라고.



“재수 없는 히지카타.”



오키타는 아무도 없는 뒷마당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담장에 기대어 있는 것조차도 힘이 들어 그는 서서히 몸을 기울여 바닥에 모로 누웠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흙바닥에 가져다댔으니 더러워질게 분명했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했던 날처럼 삼일간은 머리에서 모래가 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태양 볕 아래 몸을 일으킬 기운이 없었다.

불안을 쥐어짠 매 순간이 칼날을 잡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다면 이가 빠진 칼이라 다치지 않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날이 잘 벼려진 것을 맨손으로 잡을지도 모르는 그런 확실치 않은 막막한 두려움 속에서 오키타는 몇 번이고 잡는 쪽을 택했다. 고작 불확실의 확률 때문에 놓칠 수 없는 갈망이었다. 그래서 담담한 척 용기를 긁어모아 시퍼런 날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한 선택을 지난 세월 셀 수 없이 많이 했었다. 백 번은 했으면서 백 한 번은 할 수 없는 게 또 뭐란 말인가. 시니컬하게 스스로를 비웃어 봐도,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그가 내비치는 거리감과 망설임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의 순간적인 후회들이 전부 진심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음에도, 마음은 다쳤다. 상처가 생겼고 가슴이 아팠다. 당황과 두려움과 낯선 감정에 물든 그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도무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게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로 진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얼굴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순간의 실수라서 없던 일로 무르고 싶다고 마음 깊이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키타는 선택으로부터 도망쳤다.



여태까지처럼 무신경으로 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적신호가 들어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그 순간은 불안했고 몸을 씻는 순간에는 분했고 옷을 갈아입는 순간에는 두려웠으며 지금 이 순간은…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처음 남자와 몸을 섞은 아침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버림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쓸쓸했다.



감정들을 다시 깊은 수면 아래로 꾹꾹 눌러 담는 동안 해는 서서히 움직였다. 그늘이 조금 길어지는가 싶어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런 잠깐의 도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는 내일도 모레도 얼굴을 마주해야 할 것이고 이딴 끔찍한 두려움 속에서도 마음은 어디 하나 부스러져 사라지질 않으니….



“소고!”



생각은 갑자기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드는 손길에 의해 중단되었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자 그토록 피하고 싶던 남자의 얼굴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양 팔에 붙들린 어깨가 우악스럽게 흔들렸다. 그는 꽤나 안절부절 못하는 낯으로 부산을 떨었다.



“너 왜이래. 많이 아픈 거야? 병원? 어지러워 혹시?”



손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가 목덜미를 짚었다 팔을 틀어쥐는둥 부산스럽게 굴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다급한 목소리가 숫제 화내듯이 오키타를 뒤흔들었다. 오키타는 툭, 그의 손을 떨쳐내며 대답했다.



“더워서요.”



내 방이 너무 더워서…. 그렇게 말하며 눈을 다시 감자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울컥하고 또 다시 불안감이 머리를 짓눌렀다. 히지카타의 팔이 천천히 뻗어져 나와 바닥에 대고 있는 머리를 안아 올렸다. 머리칼에 잔뜩 묻은 모래들을 조심스럽게 털어주는 손길이 이윽고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정돈해 무릎 한 쪽을 내어주었다. 모래바닥보다 푹신한 무릎에 고개를 묻으며 오키타는 길어진 햇살에 눈을 찡그렸다.



“…찾느라 한참 걸렸어. 대체 어딜 가려고 그 잠깐을 못 참고 나돌아다녀.”



말하는 그에게서 옅은 땀 냄새가 났다.



“…난 그래도 그때 내 방에 얌전히 있었는데. 불공평하잖아.”



머뭇거리는 말씨였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떨림을 통해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에는 원래 이자가 붙는 법이니까요.”



오키타는 대답과 동시에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과연 신센구미를 몇 번이나 뒤졌을까. 적어도 자신보단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얌전히 방에만 처박혀 있는 그를 몰랐기 때문에 흡사 미친 사람처럼 온 동네를 사방팔방 헤집고 다녔었다. 벌겋게 뒤집힌 눈으로 정처 없이 집구석을 뒤지는 자신을 주변에서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는 것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듣게 되었다. 극도로 좁아진 시야는 찾는 것을 눈앞에 둔 채로도 보이지 않게 만들곤 했다.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으면 감찰반 풀려고 했다.”



“권력 남용이 참 당당하네요.”



“내 직속부대니까 상관없어.”



의미 없는 대화와 필요이상으로 친밀해 보이는 자세가 불편했다. 인상을 찡그린 채 눈이 맞자 그는 겸연쩍은 듯 시선을 굴렸다. 햇살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고 생각했는지 히지카타는 손을 뻗어 머리 위로 차양을 드리웠다. 손 모양대로 기다란 그림자가 생겨나서 따갑게 내리쬐던 태양 볕을 막아주었다.



아 역시 안 되겠어. 오키타는 목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삼키기 위해 혀를 꽉 깨물었다. 고작 그게 뭐라고, 고작 그게 대체 뭐라고 자신은 또 다시 칼날을 잡고 싶어진단 말인가.



“히지카타씨…”



남자의 시선이 부름에 이끌려 돌아왔다. ‘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달았다. 그 어떤 유혹이 이보다 감미로울 수 있을까. 아마 평생가도 이 남자에게 넘어가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고, 오키타는 생각했다. 약점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자신은 그에게 꼼짝을 할 수 없고, 눈이 먼 사람처럼 한치 앞을 가리지 못하고,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이 마음을 희석시키진 못했다.



“원한다면 없던 일로 해요. 술 핑계를 대도 좋고, 아니면 욕구불만 이었대도 좋아요. 못 견디겠으면, 그냥 잊어버려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겨먹겠어요. 오키타는 목소리가 흔들리는 걸 숨기려 말꼬리를 잘랐다. 그럼에도 먹먹함은 가시질 않아 차양을 드리우던 손을 끌어다가 부은 눈두덩에 가져다 댔다. 볕을 오래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을 차게 식어 서늘해져 있었다. 차오르려던 설움이 눈꺼풀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머지않아, 히지카타의 침울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해 보이기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이내 그는 덮고 있던 손을 치워내고 오키타의 양 어깨를 덥석 끌어다 올렸다. 어정쩡하게 히지카타의 시선으로까지 끌어올려진 오키타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니가 해야 할 대사가 그거야? 꼴도 보기 싫으니 눈앞에서 꺼지라거나, 앞으로 손가락 하나 댔다간 가만 안두겠다거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말도 걸지 말라고 해야지! 없던 일이라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차분한 질책이 날아들었고, 오키타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화를 내고 있는 건 그쪽이면서 남자의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난처한 얼굴로 오키타는 천천히 손을 그의 머리위로 짚었다. 그 손짓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남자는 와락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냥 화내면 안 돼? 그래야 내가 사과를 하지… 그래야 미안하다고 빌기라도 하지. 거기서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면 내가 뭐가 돼.”



“…….”



“술의 힘을 빌었다고 해도 내 의지가 아닌 건 하나도 없었고 내 욕심이 아니었던 건 하나도 없었어. 이런 자식인 거에 대해 실망할 지도 모르지만, 없던 일로 못 하겠어 나는.”



남은 손이 느리게 그 머리를 끌어안았고 남자는 이젠 거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품을 조였다.



“너도 잊지 마. 한 번쯤은 나도 온전히 가져봤다고 생각할 수 있게. 두 번까진 안 바랄 테니까, 적어도 이 번 한 번만.”



나지막한 음성이, 그림자가 길어지는 하늘을 따라 느리게 떨어졌다.






















  • 곧 우리애 생일도 다가오니... 주섬주섬 또 옛날 글을 재업해보고...^_^;; 사실 안 올리고 남겨둔 글은 부끄러워서 남겨둔 것인데...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ㅋㅋㅋㅋㅋ....뭐...뭐라도 좀 읽을거리를 채워야 한다는 혼자만의 강박이 있습니다ㅋㅋㅋ


댓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