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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과 배송이 전부 끝났습니다. 기다려주시고 함께해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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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사입니다.
드디어 개인지 광고로 찾아뵙습니다ヽ(´∇`)ノ 하하하핫 이미 준비가 많이 늦은만큼 예약 및 제작은 타이트하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오늘부터 10일간 예약을 받고, 이후 일주일의 책주문 및 배송 기간을 거쳐 9월 셋째주쯤엔 모든 일정이 끝날 수 있도록 진행할 예정입니다.
미리 고지했던 대로 책은 stalemate, paradox 두 종류입니다. 두권 모두 B6사이즈의 문고본이며 stalemate는 전연령 paradox는 성인본입니다. 주의사항 및 특이점은 샘플과 함께 자세히 적어두겠습니다. 통합인포는 아래와 같습니다'-')♡ 현재로써는 오프라인 행사참가 예정은 없으며 통판 온리입니다.
페이지수는 다소 변동가능성 있으며,
표지는 매우많이 변동가능성 있다는 점 미리 안내드립니다.
1. Stalemate.
- 히지오키 재록본 Happily ever after에 수록되었던 중편입니다.
- 은혼 원작배경으로 히지카타가 우발적인 사고를 통해 일시적으로 여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 히지카타 후천ts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히지오키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히지오키입니다._.)ㅋㅋㅋ 취향을 매우 많이 탈 것으로 예상되니 반드시! 반드시 꼭! 샘플을 확인해주세요~! 마이너한 소재를 잡았기 때문에 넉넉하게 샘플을 발췌하였습니다.
- 원작의 여체화편과 1도 관련이 없으며 제 마음대로 두 사람을 날조하고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샘플★
1.
순간 히지카타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탄식이 절로 새어나왔다. 머리가 어떻게 됐었던 걸까. 평소였다면 했을 리 없는 실수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다시 생각해도 어리석었다. 스스로의 부주의를 탓할 수도 있었고 아주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저질러버린 급한 성미를 탓할 수도 있었지만 히지카타는 그보다는 경계태세가 느슨해진 자신의 본능이 원망스러웠다. 평소 귀신같이 꼭 들어맞곤 하던 본능적인 감이 무뎌진 것이다.
이렇게 보기 좋게 자신을 물 먹인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역시나 녀석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설마 네가 독극물을 가지고 있기야 하겠어, 하는 그런 안일해빠진 생각.
히지카타는 하얗고 미끈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궂은일이라곤 가까이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곱디고운 손이었다. 마치 귀한 댁 아가씨의 손 같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다리와 턱 없이 가늘어진 허리 그리고 목단 같은 긴 머리카락이 어깨위로 물결치고 있었다.
아. 가랑이 사이가 허전해.
생각하며 히지카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달려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이십년 하고도 조금 더 많이 살아오는 동안 몇 번 써보지도 않은 그게 없어졌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앞 뒤 구분이 안 가던 판판한 가슴팍에는 여성성을 강조하는 무언가가 달려있었다. 빌어먹을. 원치 않는 무게감에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소고 이 자식을 당장 족쳐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아니 애당초 그 녀석 가방을 열어보는 게 아니었다. 후회가 물처럼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오늘은 1박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부슈를 떠나는 날이었다. 열차시간에 맞춰 부산스럽게 짐을 챙기던 와중 오키타가 전화를 받으러 잠시 방 밖을 나갔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온갖 물건들이 잡다하게 늘어진 녀석의 방 꼴을 알고 있는 히지카타는 자신의 짐을 다 꾸린 뒤 옷자락이 삐죽 튀어나온 오키타의 가방을 보았다.
아마 저 안에는 이미 카오스가 형성되어 있겠지. 열어보지 않아도 잡동사니와 옷가지가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을 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손끝이 여물지 못한 건 그 딱 나이또래의 사내애다웠고 그것을 답답해 여기는 건 또 팍팍한 히지카타다웠기에 그는 오키타의 가방에 손을 뻗었다. 대충 옷가지라도 깔끔하게 접어서 넣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계기는 그렇게나 사소한 것 이었다. 가방에서 정체모를 하얀 가루들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게 다 뭐야.’
히지카타는 눈을 끔뻑거리며 비닐봉지들을 쓸어 모았다. 다섯 개정도로 소분 된 하얀 가루들은 척 봐도 수상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냄새와 촉감만으로는 정확히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밀가루나 설탕처럼 귀여운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의문에 잠겨있던 히지카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것의 정체를 분간해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빠져들었다. 하다못해 기다렸다 오키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추궁이라도 해볼 것이지. 일이 틀어질 운명이었는지 뒤늦게야 마땅히 했어야할 선택지가 떠올랐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판단은 틀렸을지언정 절차까지 틀린 것은 아니어서 그는 나름대로 정석적으로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손가락에 먼저 찍어보고 팔뚝 안쪽 여린 살 위에 문질러보아도 어떠한 반응도 없었기에 다음 단계인 입술에도 두드려 봤지만 쓰라림이나 부어오름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루가 독극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그는 마지막으로 혀끝으로 맛을 본 것이다. 미량이었고 어느 정도 시중에 유통되는 마약들은 꿰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설마 이렇게 어마어마한 물건일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변해버린 신체를 더듬더듬 손으로 만져보았다.
맙소사 하느님 아버지. 입은 저절로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이대로 영원히 여자로 살아야 한다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리고 망연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얌통머리 없는 얼굴을 한 녀석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곤도씨 전화예요. 아무래도 히지카타씨 칼은 수명이 다돼서 고치기 힘든가 봐요. 제건 아직 쓸 만하니 수리를….”
통화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하며 걸음을 옮기던 녀석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히지카타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 오키타를 바라보며 히지카타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마음속으로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던 오키타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어져갔다.
“저….”
어쩐지 사무적인 얼굴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뭐라고 말을 붙여보려던 찰나 오키타가 히지카타의 말꼬리를 자르며 물었다.
“누구시죠?”
“…….”
싹둑 잘려버린 뒷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굳은 히지카타는 오키타의 얼굴에 씻은 든 표정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장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담백한 눈초리였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얘기인데…. 아무리 여자가 됐다고 해도 얼굴이 그렇게나 안 남아있는 건가? 의아함속에서 히지카타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건 뜻밖의 전개였다. 저를 보자마자 가차 없이 비웃거나 혹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 취급을 하는 오키타만을 예상하고 있었던 참이라 좀처럼 뭐라고 서두를 떼어야 할 지 어려웠다.
잠시의 머뭇거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오키타는 성큼성큼 다가와 히지카타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좀도둑인지, 사생 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는 경찰서에서 하는 걸로.”
오키타의 눈은 흘끗 그 아래에 널려진 자신의 가방을 응시하였다. 아마도 가방도둑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그는 잡은 팔을 당겼다. 가볍게 끌어당기는 힘에도 불구하고 허약한 몸은 종잇장처럼 오키타에게 딸려 움직였다. 무자비한 손길과 농담 하나 섞이지 않은 말투에 히지카타는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에 대하여 오키타도 정말로 모르는 일이라는 것을.
사실 녀석이 저를 못 알아보는 시점에서 이미 결론이 난 문제였다. 그건 얼굴의 닮고 안 닮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이 일이 황당하고 어이없는 문제라는 거겠지. 뒤통수가 마치 무거운 무언가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히지카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고.”
막 문고리를 돌리던 오키타가 행동을 멈추고 히지카타를 돌아보았다. 눈이 가느다래지며 오키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마주서서 보니 두 사람의 키는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늘 내려다만 보던 꼬맹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새로웠다.
“이번만큼 네 녀석의 질 나쁜 장난이길 바란 적이 없건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오키타가 눈썹을 얕게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변명이 하고 싶으면 경찰서에서 해. 내가 경찰이니 내뺄 걱정은 말고.”
의심의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가루의 정체를 모른 채 가지고 있다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나쁜 걸까.
“나라고 요녀석아.”
히지카타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오키타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손아귀에 힘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내 보기에도 이게 참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만, 이렇게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면 나도 절대 안 믿을 얘기긴 하지만….
“가방에 대체 무슨 마약을 가지고 다니나 해서 잠깐 맛만 보려던 게 이 꼴이다. 바른대로 말해. 너 저거 어디서 났어.”
히지카타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아프게 움켜쥔 오키타의 손을 풀어내고선 다그치듯 말했다. 오키타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방 한구석에 널려있는 하얀 봉지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상황을 대강 파악한 듯 혀를 짧게 찼다.
바닥에 흩어진 하얀 가루들을 손끝에 살짝 묻혀서 냄새를 맡아본 뒤, 오키타는 제 옆에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히지카타를 올려다보았다. 둥그런 눈이 바들바들 떨면서 일그러지다가 기이어 푸흡, 하고 얄미운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지카타씨?”
“그래.”
“와… 풉. 이게 히지카타씨라구요? 거 되게… 큭.”
아마 저 웃음을 참는 것도 저를 배려서해서가 아니라 그런 편이 더 놀리기 좋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히지카타는 팔짱을 낀 채로 이마에 참을 인을 새겼다.
“웃지 말고 저거의 출처나 말해.”
그리고 역시나 오키타는 그마저도 힘들었는지 더 이상 참지 않고 바닥을 구르며 한참이나 포복절도하였다.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녀석을 한참이나 기다리던 히지카타는 이마에 새긴 참을 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엎어져 끅끅거리는 오키타의 등을 발등으로 걷어찼다. 흐으, 하며 숫제 앓는 소리까지 내던 오키타는 그 후에도 표정을 추슬러 바른 자세로 앉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천인 조무래기들 처리하면서 나온 압류물이에요.”
오키타는 하얀 가루의 정체를 그렇게 말했다.
“증거품을 왜 니가 가지고 있어! 저걸로 뭐하려고!”
히지카타가 빽 소리를 지르자 거슬린다는 듯이 한쪽 귀를 후비며 오키타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원정으로 저 멀리까지 잔당 처리를 하고 돌아온 사람을 도착하자마자 짐 풀 틈도 주지 않고 연짱으로 외근 시키는 악당이 상사랍시고 있어서 말입니다.”
“…….”
“오히려 잘됐다고 가방 건드리지도 말고 고대로 들고 따라오라면서요? 당장 그날 내 방에 다리 한 짝 뻗어보지도 못하고 바로 여기로 끌려왔는데…. 난 잘못 없어요?”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흘끗 턱을 치켜든 오키타의 앞에서 그는 결국 더 추궁하지 못하고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녀석의 입장에서는 무리한 일정인 게 당연했다. 도주한 천인 나부랭이의 끄나풀들을 잡으러 다녀온 녀석의 짐 보따리를 풀지 말라고 했던 것도 분명 자신이었으며, 피곤해하는 녀석을 억지로 열차에 태운 사람도 자신이었다. 보고서 작성할 시간조차 없이 급박하게 출발하였으니 하물며 증거물을 따로 제출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히지카타는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후회와 자책의 두통을 감내하며 손등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 뜨끈 거리는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유구무언. 화살을 돌릴 사람이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소매가 스르륵 내려갔다. 일반적인 성인남성보다도 체격이 좋은 그에게 맞춰진 유카타였으니 여자에겐 품이 넉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차림새에 두 사람 모두가 눈이 갔다.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둘렀다는 표현이 더 적당한 어깨를 지나 손끝을 가리고도 한참이 남는 팔과 두 명은 들어갈 것 같은 허리를 타고 푹 파져서 거의 배꼽까지 드러날 기세의 가슴팍에 이르러서는 결국 오키타도 눈매를 찌푸렸다. 언뜻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 아이는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으로 다가갔다.
멍하니 오키타의 행동을 응시하던 히지카타의 머리 위로 갑작스럽게 셔츠 하나가 던져졌다. 반사적으로 그를 받아들기가 무섭게 바지와 재킷이 연달아 날아왔고 히지카타는 물끄러미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훤히 보이니까 내 걸로 갈아입어요. 기차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합시다.”
그렇게 말한 오키타는 이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서둘러 방 밖을 나가버렸다. 녀석의 걸음걸이에서 멋쩍음이 묻어나오는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반응이었지만…. 그럴 리가.
연상의 여자들 다루는 것에 오히려 저보다 더 익숙해보이던 녀석이 무슨. 히지카타는 이내 떠오르는 호스트바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키타가 넘겨준 옷은 녀석의 제복이었다. 급하게 끌려나오느라 옷조차 갈아입지 못했던 어제 새벽 녀석이 입고 있던 것이었다. 부슈에 온 건 신센구미 신분이 아니라 그냥 오키타, 히지카타 개인으로써 일이었기에 도중 기차에서 갈아입긴 하였지만 지난 이틀이 얼마나 빡빡한 일정이었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히지카타는 제복을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었다.
이번 달은 스케줄이 어찌나 빈틈없이 채워져 있던지 시간을 내는 게 이루 말하기 어려울정도로 힘들었더랬다. 어떻게 무리를 해서 시간을 미루고 당겨 봐도 두 사람이 나란히 1박의 일정을 내는 게 좀처럼 불가능했다.
다음 달로 예정을 미룰까 생각해봐도 아마 오키타 녀석은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 따로 다녀오자는 반응일 게 뻔했다.
“내가 널 여기 혼자 보낼 수 있을 리가 있겠냐….”
오키타의 셔츠를 꿰어 입으며 히지카타는 홀로 중얼거렸다.
미련이 넘치고 아쉬움이 흐르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고향에, 녀석을 혼자 내려두고서는 아마 불안해서 일도 손에 안 잡혔을 것이다. 혹시나 불시착한 비행기가 한숨 돌리고 본래의 궤도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녀석 역시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것이 못내 불안하고 걱정스러워서. 그래서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쥐어짜낸 시간에 아이를 납치하듯 붙들고 부슈로 내려왔다. 본인조차 의아할 정도인 그 불안감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서 부탁대신 상사의 권위를 꿴 명령으로.
마치 윽박지르듯이 녀석을 다그친 빚을 이렇게 받다니…. 정말 내 무덤을 내가 판셈이군.
그 어이없는 우연에 옷자락을 쥔 채 히지카타는 쓴 입맛을 다셨다. 바지는 허리가 좀 헐렁했지만 밑단을 두세 번 접자 얼추 길이는 맞았다. 그러고 보니 눈높이도 대강 비슷했던 것 같고. 여자치고는 조금 큰 편 이겠구나 중얼거리던 히지카타는 문득 셔츠에서 오키타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옷깃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자 정말로 녀석의 냄새가 났다. 잠시 부끄러움도 잊고 오키타의 흔적이 짙게 남은 옷자락을 끌어안았다.
넘실넘실 끓어 넘치는 정욕이 약기운에 사라진 사내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실은 부슈 땅을 밟는 순간부터 지금 이 시점에 와서까지 단 한 번도 녀석에 대한 욕심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부슈에는 신센구미 대원들의 안치소가 있었다. 먼 곳이었지만 곤도는 굳이 시위관 시절의 인연을 끌어들여 그곳에 전사한 대원들의 넋을 기리는 장소를 만들었다. 어차피 에도에서는 조롱과 멸시를 담아서 늑대들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신센구미였으니, 시신과 위패들은 차라리 다른 땅에 보존해두는 편이 좋다고 그 역시 동의하였다.
짧은 생을 마친 동료들에게 잠든 뒤에나마 평안을 주고 싶다는 명분 따윈 자기위로 이상의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고 히지카타는 냉소적으로 생각했지만, 오키타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풍부할 질풍노도의 청소년은 그곳을 마치 자신의 관처럼 여겼다. 누나가 죽으면서부터 신센구미에 필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던 오키타는 특히 1번 대의 부대장을 자신 손으로 묻으면서부터는 종종 찾아와 미동도 없이 위패를 바라보고 있고는 하였더랬다.
섬뜩하리만치 무감각한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히지카타는 빠르게 손을 써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세히는 몰라도 아마 복합적으로 뭔가가 뒤섞여서 그 조마난 머리통 안에서 변질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다. 히지카타는 그게 딱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각 번대 별 대장이 돌아가며 일 년에 한 번씩 참배를 하고 오라는 강령을 만들었다. 안치소 방문을 공적인 임무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사적인 걸음을 뜸하게 만들 속셈이었고 시도는 얼추 맞아떨어졌다. 이번 해는 오키타와 자신의 차례였다.
히지카타는 재킷을 마저 입었다. 어깨가 조금 남긴 하지만 나쁘진 않았다. 흘끔 시계를 한 번 보고서 그는 정돈을 서둘렀다. 기차시간이 금방이었다.
해결책은 둔영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도 늦지 않겠지.
가방을 챙겨들고 문을 열자 현관에 비스듬하게 기대선 오키타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의 위치가 낮아져서 그런지 하얀 유카타 자락을 나부끼며 서 있는 녀석이 훌쩍 커보였다. 햇살을 받은 머리칼은 기묘한 빛깔로 반짝였고 살짝 내리깐 눈동자는 나른하게 끔벅거렸다. 늘 내려다보기만 해서 언제나 품안의 아이처럼 작다고 여겨왔는데 여자들이 보는 녀석은 그렇게 마냥 어리기만 한 애송이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순간적으로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녀석을 멋있다고 생각한 머리를 한 손으로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가자.”
발치로 오키타의 가방을 휙 던지자 녀석이 비죽 웃었다.
“속았네요.”
“…뭐가?”
히지카타는 먼저 앞서서 현관을 빠져나가며 대답했다. 한 발치 뒤처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오키타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그놈들의 말에 따르자면 완전 끝장나게 만들어주는 약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먹은 사람의 기분이 끝장나진 않을 것 같고… 자기 거 더듬으면서 좋아할 변태가 있을 리 없잖아요.”
오키타는 여상하게 말하며 빙글거리는 비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본인 말고 주위 사람을 끝장나게 해준다는 의미 일려나?”
고운 입에서 질 낮은 농담이 거리낌 없이 튀어나왔다. 히지카타는 눈을 부릅뜨며 오키타를 뒤돌아봤지만 녀석은 그런 주제에 담백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호기심의 빛이라도 띄우고 있었으면 당장에 밀어뜨려버렸을 것이다.
“허튼 생각마라 소고.”
“과한 걱정이시네요 히지카타씨. 한창 나이는 벌써 지났다구요.”
“이제 갓 스물이 된 사내 녀석이?”
히지카타는 웃기지도 않는 능청을 들었다며 귀를 털었다. 지난 게 아니라 아직 오지도 않은 거겠지. 별 어이없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구박을 내뱉으려는 찰나, 오키타의 대응이 조금 더 빨랐다.
“설마요. 나 말고 히지카타씨가 끝났단 소리죠.”
“…….”
“그 나이면 이미 퇴물 아닌가? 내 보기엔 그런데.”
언제까지나 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에요. 오키타는 그렇게 말하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살살 한계까지 약을 올리다가 화도 못 내게 투명한 웃음을 터뜨리는 건 평소의 저에게 하던 것과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뭐라고 맞받아칠 시기를 놓쳐버린 히지카타는 이내 제가 과연 그걸 받아쳐야 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고작 저놈 입에서 퇴물소리 듣는 게 뭐 어떠하다고. 여자가 됐다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상황 아닌가?
히지카타는 생각해 놓고도 뭐라고 납득하기 어려운 그 미묘한 감상에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 *
열차 안은 생각보다 북적거렸다. 여러 역을 경유해서 가는 완행이라 그런지 좁은 복도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자리를 찾으러 가는 걸음이 조금 더뎠다. 피차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입을 꾹 닫고 접촉을 피하려 애쓰는 몸짓을 보였다. 오키타는 반 걸음 정도 앞서서 차표가 가리키는 자리를 향했다. 갑작스럽게 낮아진 시야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히지카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더디다. 흘끔 그를 돌아보던 오키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약간의 소음과 함께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정신머리를 어디다 팔고 다녀!”
좁은 열차 안에서, 소란의 주인은 의외로 히지카타였다. 어깨를 부여잡은 웬 남자가 그 앞에 버티고 서서 큰 소리로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좁은 통로를 비껴 지나가다 부딪힌 모양이었다. 히지카타의 표정이 어이없어 하는 걸 보아하니 뭐 자해공갈단 같은 녀석일지도 몰랐다.
“…미안합니다.”
“대체 왜 멀쩡히 걸어가는 사람한테 어깨를 디밀긴 들이미느냔 말이야! 눈깔은 장식으로 달고 있어?”
아니면 상대방의 사과에도 여전히 언성을 높이는 걸 보면 그냥 소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놈일지도.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오키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리를 찾아갔다. 창가 쪽에 먼저 가방을 놓고 히지카타를 기다리려는 순간 퍽 하는 타격 음이 들려왔다.
“이 자식이! 어디 눈을 똑바로 홉뜨고 섰어? 당장 허리를 꺾어 사과할 것이지!”
남자가 히지카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주먹으로 기차 내부를 세게 치면서 난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생겨나고 시선이 그들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아닌 척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입꼬리였다.
아주 주목받고 싶어서 안달이 나셨군?
오키타는 그 해파리 같은 인간을 향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너 같은 녀석은 바닥을 빌빌 기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전에 네놈이 기어 다닐 텐데….
오키타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해프닝을 무시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히지카타라면 아마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아마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히지카타는 제가 사고를 치기 전에 막으려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겠지만 지금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그 어른스런 대처를 강조하던 사람이 당사자였다. 무력을 쓰든 아니면 감투를 이용하든 가능하면 시선을 모으지 않고 히지카타가 정리할 터였다.
저런 놈은 그냥 코뼈를 부숴버려야 제정신을 차릴 것을. 오키타는 눈을 감으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덩치는 산만한 주제에 흘끔흘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던 같잖은 꼴을 두고 보기 몹시 아니꼬웠지만 괜히 나서서 고지식한 경찰 나리에게 잔소리 들을 생각은 없었다.
오키타는 이내 생각의 방향을 출발 직전 받았던 곤도의 연락으로 돌렸다. 안치소에 다녀오는 동안에는 딱히 칼을 쓸 일이 없으니 이때가 기회다 싶어 곤도에게 줄곧 사용해왔던 칼을 맡겨두었던 참이었다. 요새 너무 일정이 빠듯해서 좀처럼 손질을 못해줬기에 행여 날이 무뎌지지 않았을까 걱정되던 차에 그나마 틈이 난 것을 놓칠 수야 없었다.
겸사겸사 히지카타의 것도 빼앗듯이 곤도의 품으로 밀어 넣었는데 그쪽에 아마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무 험하게 다루기도 했고 그때그때 손질을 안 해줘 이가 빠진 구석도 많다고 하였다. 고쳐 쓸 바에야 그냥 버리고 새로운 놈으로 사는 쪽을 대장간에선 추천했다.
애초부터 시장 바닥에서 대강 아무거나 주워온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가 나갈 만큼 오랫동안 썼던 물건이었다. 물론 히지카타에게 말해봤자 미련 없이 버리려 들 게 뻔했지만, 그래도 생사고락을 함께 넘어온 칼을 던져버리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고 곤도 생각도 마찬가지인 듯하였다. 대장간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어떻게든 쓸 만하게 고쳐보도록 노력하겠다고 곤도는 통화 말미에 전했다.
아무튼 그 남자는 무사 출신이 아니라 그런지 칼에 대한 욕심도 애착도 없는 사람이었다. 칼을 그렇게 무시하니까 번번이 요검에게 당해 고생하는 거 아냐.
오키타는 코웃음을 치며 톳시를 떠올렸고, 그 순간 심상치 않은 수선스런 분위기에 상념에서 깨어나야 했다. 주변에서 어머 어떡해, 하고 수근 대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뭔가 틀렸다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오키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앙큼 그만 떨고 얌전히 따라 나오라고 이년아!”
“놔라, 좋게 말할 때.”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입은 어이없는 탄성을 저도 모르게 토해냈다. 굳어버린 오키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무뢰한의 한쪽 손에 팔목을 잡힌 채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있는 히지카타의 모습이었다. 요령 좋게 버티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쉽사리 떨쳐내진 못하고 있었다.
오키타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빡, 하고 코뼈가 깨끗하게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겁먹은 사람들의 숨 참는 소리와 함께 열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오키타가 흘끔 돌아보자 관람객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리고 숨기에 바빴다. 팔목을 움켜쥔 남자의 손마디를 반대로 깔끔하게 꺾어주고 나서 오키타는 바닥을 구르는 남자는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시정잡배만도 못한 이런 놈한테. 겨우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조무래기 녀석에게 히지카타가….
머릿속이 정지한 상태로도 오키타는 습관적으로 녀석의 등을 꾹꾹 발등으로 밀어 바깥으로 굴렸다. 통로를 벗어나 기어이 출입문 바깥으로까지 남자를 떨어뜨리고 나서야 오키타는 히지카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무서운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잡혀있었던 팔목을 빙글빙글 돌리다 눈이 마주친 히지카타는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오키타를 향해 ‘뭐?’ 라고 입모양만을 벙긋거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
“겸연쩍어 해야 하는 거냐? 별 수 없잖아.”
몸이 이런걸. 하며 히지카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지금의 제 몸을 완벽하게 본래의 자신과 분리한 것 같았다. 마음에서부터 진정으로 ‘이건 내가 아니야.’ 라고 치부해버렸는지 히지카타의 얼굴에는 객쩍거나 창피한 기색 하나 없었다.
오키타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 때문이었으니까. 무기도 없이 완력만으로는 여자가 제 몸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사내에게 밀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성과는 별개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키타는 티 나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히지카타의 눈을 피했다. 마음속에서 거센 파도가 일렁거렸다. 주변의 시선이 갑자기 따끔거리며 느껴졌다.
오키타는 별안간 히지카타의 한쪽 팔을 붙들고서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아프다, 인마.’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 않고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창가 좌석에는 히지카타를 멋대로 밀어 넣고서 통로 쪽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옆자리를 자신으로 틀어막음으로써 방어벽을 세운 기분이 들어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별다른 생각 없었는데 덜컥 실감이 났다. 그는 지금, 비록 약 때문에 한시적인 일일지라도, 여리고 가늘어 부서지지 않도록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마치 누님처럼.
톱니가 삐걱하며 어긋나며 갑자기 모든 공정이 멈춰버렸다. 같은 선상에 놓아 본 적 없는 두 사람이 갑작스레 동일한 공간으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타의에 의한 상황변화와 자신의 의식 자체가 어긋남으로써 괴리감이 생겼다. 거부감보다 이질감이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 오키타는 잠시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 틀어진 틈새를 타고 슬그머니 괜한 감상이 스며들어왔다. 왈칵 하고 방벽을 넘어 감정이 온 마음을 범람했다. 수분으로 가득 채워진 스펀지처럼 온 몸이 그것을 머금었다. 매우 초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떠서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키타는 히지카타를 다시 한 번 힐끔 돌아보았다. 뼈밖에 없던 누나의 팔목처럼 가느다란 그의 팔엔 남자의 우악스런 손자국이 새겨져 붉게 변해 있었다.
원래의 그라면 작아서 입지 못할 자신의 제복이 조금 헐렁했다. 옷에 가려지지 않은 모든 부분은 전부다 허약해보였다. 손목이며 발목이며 목덜미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그의 목이 허전했다. 대강 옷가지만 걸치면 된다는 생각에 스카프를 챙겨주지 않은 탓이었다.
일하는 중도 아닌데 복장을 완벽하게 갖출 필요가 뭐가 있담. 그리고 어차피 기차 안이라 춥지도 않은 걸. 내버려 둬,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머릿속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냉소적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내버려두라는 지시신호를 들으면서도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오키타는 가방을 뒤져 스카프를 찾아냈다. 자리에 앉은 뒤로 연신 팔목을 주무르던 히지카타는 그가 하는 모양새를 가만 지켜보기만 하였다. 오키타는 그나마 무표정한 얼굴이라도 뒤집어 쓴 채 스카프를 히지카타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서툰 솜씨로 꼼꼼하게 그것을 돌리고 매듭 지어 재킷 안까지 갈무리 해 넣은 뒤에야 비로소 그의 목덜미에서 손을 뗐다.
“너 지금 뭐하냐.”
“…아마도 기한이 있는 걸 겁니다. 그 약.”
“뭐? 얼마나? 뭔가 들은 거 있어?”
히지카타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키타는 그 얼굴을 거북스럽게 손등으로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복용법이 하루 한 번 씩 이었으니 정량을 과하게 초과하지 않은 이상 내일쯤이면 돌아올 거예요. 설마 맛보겠다고 정체도 모르는 가루를 들이부은 건 아닐 테고.”
“손끝으로 찍어먹었어! 그럼 더 빨리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르죠.”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차는 이내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파묻자 살짝 굳어있던 어깨의 힘이 느리게 풀려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던 허리춤이 허전했다. 칼을 매고 있지 않다는 게 이제와 불안해지려 들었다.
“좀 자세히 말해보라고 요 녀석아.”
금방 입을 다물어버린 오키타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부러질 것 같은 팔목으로 히지카타가 멱살을 잡아왔다. 그를 착잡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오키타는 보이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네. 긴장 돼 죽을 거 같아.
뇌가 이성을 잃고 그렇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던 탓이었다. 상상에서마저 결코 이루어져 본 적 없는 간절한 바람. 그것이 이 터질 듯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항상 저보다 성큼 앞서 있던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적에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도장 앞에서 시뻘건 유카타를 펄럭이며 쓰러지는 것을 곤도와 함께 목격한 오키타는 저 남자가 금방 죽겠구나 생각했었다. 피를 저렇게 많이 흘렸으니 살아날 방도가 없어. 어린아이 눈에도 순간적으로 그렇게 인식될 만큼 히지카타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다 남의 피를 뒤집어 쓴 것이라는 게 밝혀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흠뻑 젖어있었으면서도 남자는 상처하나 없었더랬다. 옷은 아무리 빨아도 핏자국이 가시질 않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남자가 쓰러진 원인을 영양실조라 하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미츠바가 차려준 밥상을 순식간에 비우던 그 날 이래로 곤도의 휘하로 들어오기까지 단 한 번도 도장사람들에게 지는 일이 없었다. 오갈 데 없는 칼잡이들이 모여 있던 도장에서도 단연 돋보이던 청년이었으니 당시 히지카타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았던 저는 어떻게 기를 써 봐도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게 당연했다. 붙었다하면 깨지기 일쑤. 대련에서 히지카타가 진심으로 덤벼들게 만드는 데만 해도 수년이 걸렸다. 비렁뱅이들 사이에 유독 고고한 학처럼 서있는 그 남자는 어린 마음에도 태산 같았다.
대책 없이 무른 곤도는 한 번도 약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아직은 어린 오키타를 그 넓은 품으로 품어주던 다정한 남자는 결단코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언질을 준 적이 없었지만, 오키타는 머리가 미처 다 크기도 전에 그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득한 어둠 속이었다.
‘알 바 아냐. 너에 관한 건.’
바람과 희망 같은 건 남자의 손에 산산이 부서졌다. 누나를 버렸던 그 상황에서까지도 남자는 자신보다 강했다. 작정을 하고 덤볐는데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분노를 원동력 삼아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휘두를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 힘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봤자 돌아오는 건 싸늘한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면 강해져야해.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으면 녀석을 이겨야 해.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바르면서 상처 난 마음을 애써 기웠다. 세상의 쓰디쓴 모든 것들이 입안에 억지로 우겨넣어진 기분이었다. 점차 머리가 자라고 키가 커지면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때에야 열에 다섯 정도는 그를 이길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에도로 올라와 제복을 입고 무사로써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된 그 순간. 스스로에게 무적의 타이틀을 붙여주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던 그 즈음에 드디어 코앞에서 마주본 남자는 어느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전부가 아닌 노련한 책략가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의 그 기분은, 글쎄… 겨우 허탈함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쪽이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해도 그 사람이 멈춰주지 않는 한 간격은 줄어들지 않았다. 누군가 무릎을 두드려 주저앉히는 것 같던 허무.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내재한 목표는 한 번도 저에게 그 꼬랑지조차 잡으라 허락해주지 않았다. 허물어지지 않는 그들의 거리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 무력하던 어린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심어준 남자는 그것을 뒤흔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음의 기둥이 되어버린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축대는 남자로부터 나왔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종류의 것이었다. 한 몸이 되어버린 그 지독하게 씁쓰레한 것은 이제는 겉에서 보기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터였다.
잠들어버린 나의 근간을 이제야. 여기까지 와서야, 흔들어대지 마.
오키타는 한숨을 쉬며 히지카타의 손목을 잡았다. 한 손아귀에 양 팔목이 빠듯하게나마 잡혀 들어갔다. 힘을 주지 않아도 그의 손길은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히지카타는 별 수 없다는 듯이 오키타를 털어내고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뺨 위를 굴렀다. 속눈썹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깜빡일 때마다 자꾸만 머리털이 옆을 향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기차의 작은 움직임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부산을 떨었다.
“다녀온 일은 어땠어. 잘 마무리했어?”
손바닥에 맺히는 식은땀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고 있던 오키타의 옆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휘몰아치던 긴장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팔딱거리던 심장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옆에 앉은 이의 목소리와 말투는 여전히 알고 있던 그가 맞았다. 당연하지만.
“보고서 작성 면제해줄 테니 구두로 보고 올려 봐.”
히지카타의 얘기에 오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짭니까? 약속했어요? 하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히지카타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냐? 두말 안 할 테니 보고나 해.”
오키타는 발치에 내려놓은 가방을 뒤적이며 현장수첩을 꺼냈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종이를 흘끗 본 히지카타는 질린 얼굴을 했다. 악필도 저런 악필이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듯이 얼굴 위를 훑고 지나갔다. 구두 보고가 피차 좋지 않느냐는 언젠가의 녀석의 악에 바친 제안이 떠올랐다. 아마 다섯 번 정도 보고서를 물렸던 때였을 것이다.
‘알아볼 수 있는 글자로 써와.’ 되풀이 되는 이유로 수차례 보고서를 돌려받으면서 오키타는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그건 강아지 발을 빌려 쓴 것 같은 글자를 억지로 읽어내야 했던 히지카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번 두 번 까지는 보고를 받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세 번 네 번 까지 반복되는 시점에선 이미 보고는 뒷전으로 미루고 녀석의 서체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것이 오키타의 심기를 갉작갉작 괴롭히는 일이라는 건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여덟 번째는 곤도까지 동원이 된 뒤에야 녀석의 발작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도끼눈을 뜨고 마치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녀석은 기어코 저의 앞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반복해서 썼던 내용인지 본문을 보지도 않고 술술 적어 내려가는 꼴이 적잖이 열 받은 상태였다.
우습게도 히지카타는 그때의 기억이 퍽이나 선명했다. 아이의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과 거침없는 손놀림과 늘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녀석이라 생각했던 머리통에서 한가득 쏟아져 나오는 글자들이 ‘내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봐준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책상 앞에서 그는 마치 보호자가 된 기분으로 그 종이 위로 먹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먹이 흐려졌다 짙어졌다 글자를 만들어냈고 그 서걱거림이 기분이 좋았지만, 여전히 알아보기 어려운 악필이었다. 절대 본인도 못 알아볼 거라고 자신했지만 녀석은 버벅임 하나 없이 줄줄 그것을 해독해 나가서 주변사람들을 기함하게 했다. 그 뒤로도 꼬박꼬박 구두보고 대신 서면으로 보고를 받아왔지만 녀석은 여전했다. 수첩에는 여전히 암호처럼 생긴 글자들이 빼곡했다. 히지카타는 저의 노력을 전부 수포로 돌려버린 녀석의 악필을 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멀리까지 도망가서 그렇지 그 외엔 딱히 어려울 것 없었어요. 감찰반에서 찍어 올린 의심 구역 위주로 돌았더니 금방 덜미가 잡히더라고요. 네 번째인가? 뭐 그쯤 발견했던 것 같은데… 이미 자기네들을 잘라버린 걸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꽁지 빠지게 달아나던 것 치고는 그 놈의 약물에 미련 못 버린 걸 보면 아마 윗선에서 잘 막아줬다고 생각했나본데. 이미 거물들은 손 털었으니 자기 팔자 자기가 똥물에 처박은 꼴이죠 뭐.”
애초에 오키타가 굳이 그 먼 길까지 잔챙이들을 쫓아가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진범들이 저는 아닌 척 꼬리만 잘라내고 버렸으니 아쉬운 대로 잘린 놈들이라도 챙겨서 압박을 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털어낸 조각이라도 살뜰히 챙겨보겠다고 먼 거리를 왔다갔다 애써야 했던 오키타는 그런 것에 비해 꽤 무덤덤한 어조로 얘기했다.
“약물은 지금 소지하고 있는 다섯 봉 빼고 전부 소각했어요. 유통되기 전에 미리 차단해서 망정이지….”
흘끗 아이의 시선이 히지카타를 위 아래로 훑었다. 고개는 무심하면서도 확실히 알아챌 만큼 반대로 휙 돌아갔다.
“상상만으로도 영, 끔찍할 뻔 했네요.”
오키타는 노골적으로 혀를 쏙 내밀며 맛없는 음식을 먹은 것 마냥 고갤 저었다. 입맛 버렸다는 속내가 숨길요량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뭐 인마?”
“히지카타씨는 돌아가서 증거품 보존 수칙부터 좀 다시 외울 필요가 있겠는데요.”
“야! 내가 이걸 증거품인줄 알았으면 설마 건드렸겠냐!”
바락 소리를 지르자 오키타는 귀 한쪽을 후비며 낮게 중얼거렸다.
“의도는 결과에 수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히지카타 부장님? 이미 나와 있는 결과에 행위의 변명을 붙이시는 게 참으로 답지 않으시네요.”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저걸 그냥? 죽여 살려? 말을 또 왜 이렇게 잘해?
히지카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너 피스. 언젠가 곤도가 말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주문을 외며 그는 애꿎은 창문만을 박박 긁었다. 자신이 흘러가듯 했던 말 한 마디도 잊지 않고 시기적절하게 인용해먹는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는 장시간의 이동에도 피로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착하면 여독 풀 시간을 주나 봐라. 치사한 복수를 다짐하며 히지카타는 흘끗 녀석을 응시했다. 긴 손가락이 힘주어 종이를 넘겼다. 손이 새삼 다부져보였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벗겨놓으면 녀석은 꽤나 남자다운 몸과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밸런스가 잘 잡힌 체형과 탄탄한 근육으로 감싸인 뼈대는 선이 곱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런 주제에 굳은살과 툭툭 불거지는 핏줄을 가진 커다란 손이라니. 가끔 녀석에게 육탄 공세를 퍼붓는 여자들의 존재가 오키타의 남성을 증명해주곤 하였다. 거죽은 왜 또 저리 멀끔하게 생겼는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자신의 시선이 낮아진 탓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녀석은 한 뼘이나 자라보였다. 눈의 착각. 뇌가 일으키는 짧은 혼동에 그는 새삼 멀미가 일었다. 천천히 걷던 심장이 어느새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13일 새벽 4시 반 경에 사건 종료하고 현장 철수 마쳤습니다. 용의자는 총 여섯 명 전부 생포해서 올려 보냈고 잔당 수색 때문에 남은 놈들도 아마 오늘쯤이면 복귀했을 겁니다. 정황증거는 본래 히지카타씨 담당이었으니 잘 아실 테고 물증도… 보고 안 해도 아시겠네요.”
“그래…. 착실한 실험실 모르모트가 돼서 직접체험까지 해봤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히지카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손이 어깨근처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머리를 기르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여자 몸을 하고서 머리를 기른다는 건 와 닿는 의미가 좀 달랐다. 손바닥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는 흑발을 콱 움켜쥐고 히지카타는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새벽 네 시라면, 세 시간도 안 걸린 거 아냐? 아무리 돌격대라고 해도 그런 속도가 나올 리가 없는데…. 야, 너 애들 안 데리고 뛰었지?”
“…뭐…글쎄요.”
“얼씨구? 여섯 명 모여 있는 아지트를 혼자 쳐들어가셨어요? 목숨이 두세 개쯤 되는 거냐? 죽여도 안 죽는 불사의 특혜라도 받았어?”
팔짱을 끼고 오키타를 정면으로 노려보자 답지 않게 녀석은 움츠러든 듯 시선을 통로 쪽으로 돌렸다.
“처음부터 뒤처지는 녀석들은 버리고 가겠다고 말했잖아요.”
몸이 히지카타에게서 한 뼘 정도 멀어졌다. 대체 이게 무슨 거리감이야. 기분이 몹시 꺼림칙한 탓에 히지카타는 저 멀리 도망간 오키타의 얼굴을 마주하려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이 집요하게 녀석의 눈을 쫓았고 그럴수록 오키타는 슬금슬금 몸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먼저 찾아낼 생각이었던 거지 혼자 덮칠 생각은 아니었어요.”
뭐 일단 예정은 그랬어요. 하며 한 수 접어주는 말꼬리가 별일이네 싶어 히지카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져온 서류에 대강 시간과 사건정황을 휘갈겨 넣으며 대수롭잖게 말했다.
“어떻게 매년 발만 빨라지는 것 같군. 이젠 네놈 쫓아갈 수 있는 녀석이 신센구미에 없겠네.”
“야마자키 있잖아요.”
“그런가. 궁금하니 다음에 둘이 한 번 붙어보던가.”
“이긴 사람한테 이번 달 비번 몰아준다면 생각해 보죠.”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무미건조하게 오고갔다. 히지카타는 서류에 신경을 집중한 채로 생각나는 대로 말을 이었고 오키타 역시 싱거운 대꾸만 이어지는 걸로 보아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는 모양이었다.
“도망가는데 특화 된 약쟁이들을 쫓는데 겨우 세 시간이라면 내가 탈주해도 반나절이면 뒤집어쓰겠네.”
시간을 기록하며 히지카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옆자리가 조용해졌다. 오키타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는 멀거니 아이의 반응을 예측해보았다.
아마 웃기지도 않는다는 목소리로 꼭 좀 도망가달라고, 그래야 히지카타씨를 내가 죽일 테니 부탁 좀 드리겠다는 소리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늘 하듯 농담 섞인 비웃음이 입꼬리에 걸리겠지. 그럼 뭐라고 답할까 가만 생각에 빠진 히지카타는 쉼 없이 휘갈기던 펜을 놓았다.
2. Paradox
- 티스토리에 공개되어 있던 글의 재록입니다. 다소의 수정을 거쳤으며 전체적인 흐름은 동일합니다.
- 19금 소재가 나오긴 나와서 성인본이 되었지만 야한 걸 기대하고 보시기에는 실망할 확률이 높습니다. 떡치는 장면도 2~3페이지 정도로 매우 짧고 빈약하다는 점, 미리 고지해드립니다.
- 은혼 원작배경으로 오키타의 짧은 가출을 소재로한 이야기입니다.
☆샘플★
0.
“대장 거기서 뭐하세요?”
“…별로, 아무것도.”
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여서 묻는 겁니다.
야마자키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다음 질문을 삼켰다. 첫째 이유로는 손에 든 빨랫감이 어서 제자리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오키타의 무성의한 대꾸에서부터 어차피 제대로 된 얘기를 듣긴 힘들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오키타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둔영 입구를 응시하고 있던 건 정오 무렵부터였다. 그러니까 남에게 도움을 청해야할 일이었다면 진즉에 그러고도 남았을 시간 동안을 잠자코 있었다는 뜻이다. 오키타가 손을 놓고 있는 이 상황자체가 이미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루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키타는 그가 말한 대로 별다른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야마자키는 이 어린대장이 결코 보이는 것만큼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오래 함께 일해 온 사람으로써의 감이었다. 앞머리 끝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추위에 발갛게 달아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지자 오키타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야마자키는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여기 앉아있는 건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이므로 어서 달아나라며 야성의 감이 지시하고 있었다. 흘끗 오키타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있던 야마자키에게 향했고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샐쭉하니 가늘어짐과 동시에 야마자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밤이 늦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하고 종종 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 심기 불편한 짐승과 마주하게 될 누군지 모를 목표물을 애도하며.
야마자키가 사라진 후에도 시간은 한참 흘렀고 달은 좀 전보다 한층 높아져 있었다. 오키타는 고개를 살며시 좌우로 꺾으며 뻐근함을 떨쳐냈다. 무던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이미 안전핀은 빠진지 오래였다.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어디서 돌발적으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일촉즉발의 상태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심지가 끝까지 타들어간 상태로도 폭발하지 않고 하루 종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폭탄을 뒤집어쓸 상대가 명확하고 확고했기 때문이지 결코 인내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표면으로 드러난 건 지루함뿐이었겠지만 기다림은 그에 못지않은 초조함을 동반하고 있었다. 다리가 달달 떨리며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오키타는 그 잔악무도한 감상과 싸웠다. 참는다는 건 생각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너 따위에게 휘둘릴 성 싶으냐며 센 척을 해봐야 돌아오는 건 처참하게 지배당한 이성뿐이었다.
그리고 참담한 결과는 고스란히 분노로 치환되어 차곡차곡 그 크기를 키워갔다. 끈질기고 집요한 기다림 끝에 달은 머리 위까지 차올랐고 소등시간과 맞물려 수선스럽던 숙소가 어느덧 말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바야흐로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멀리서 차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목표물이 들어오는 소리였다.
오키타는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1.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둔영입구에 다다르자,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는 것인지 한쪽 팔로 차문을 잡고서 허리를 숙인 남자가 보였다. 마치 연인의 귀가 길을 배웅하는 듯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럼 다음에 또.’ 하며 뒷문을 소리 없이 닫은 남자는 까맣게 썬팅 된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본 뒤에야 몸을 돌려 둔영 쪽으로 향했다.
거 참. 대단한 매너남 나셨네.
삿된 말이 튀어나오는 걸 애써 씹어 누르며 오키타는 팔짱을 끼고 입구에 버티고 섰다. 무덤덤한 가면을 뒤집어 쓸 것도 없이 만면에 분한 기색을 띄운 채였으므로 지나가던 누군가 봤더라면 잔뜩 겁먹어 피했을 만큼 흉흉한 모양새였다.
달빛이 비추는 길을 벗어나 문 앞에 다다른 남자는 오키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놀람대신 짧은 짜증이 그의 이마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오키타를 스쳐지나갔다.
“어디 다녀옵니까, 히지카타씨?”
까드득. 입술이 날카로운 이빨에 터지는 소리가 고요한 목소리에 묻어들었다. 히지카타는 대답대신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우악스럽게 풀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겁을 먹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오키타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늦은 귀갓길에 오른 남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오키타를 무시할 따름이었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보폭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숨을 깊게 한 번 내쉰 오키타는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세상에 둘도 없을 흉흉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올 때완 달리 뒤를 따르는 때에는 발소리조차 없었다. 남자를 따라 당도한 곳은 집무실이 아닌 히지카타의 방이었다. 쫓아오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는지 히지카타는 문을 닫지 않고 성큼 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들어 선 오키타가 미닫이문을 거칠게 닫았다.
“어디 다녀옵니까?”
“…알아서 뭐하게?”
“그건 히지카타씨가 알 필요 없는 문제구요.”
“…….”
대답 대신 히지카타는 뒷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었다. 온종일 피우지 않은 모양인지 아침에 비해 별반 줄어들지 않은 담배까치들이 보였다. 눈으로 개수를 헤아린 오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담배도 참았어요?”
히지카타는 흘끗 오키타를 눈으로만 노려보더니 불을 붙였다.
“어디 다녀옵니까?”
“호텔.”
“왜요?”
“왜긴. 임무니까.”
매섭게 노려보는 오키타에게서 등을 돌리며 그 역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딴 임무를 왜 히지카타씨가 맡느냔 말입니다.”
쾅. 발에 걸리는 대로 걷어 찬 앉은뱅이 탁상이 방안을 나뒹굴었다. 새벽의 적막을 거침없이 깨부수는 소음에 히지카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탁상위에 놓여있던 서류가 팔랑거리며 흩어지는 걸 보면서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신경질 적으로 내팽개쳤다. 손길에서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그딴 거지같은 명령에 당신이 하루 일정을 다 빼가면서까지 따른 이유.”
말리는 사람 하나 없이 감정이 극한까지 예민해진 두 사람은 팽팽하게 맞붙었다. 방 안의 공기마저도 날카로워진 기분이었다.
“그럼 니가 싫다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는데 누가 해. 너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 여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지? 대장쯤 되는 녀석들 스케줄을 한 번 틀어버리면 얼마나 번거로워지는지 몰라서 이러는 거냐?”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남자는 눈앞에서 성마른 표정의 소년을 마주했다. 노려보는 서늘한 시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주친 눈동자에서는 분노가 시퍼렇게 끓고 있었다.
“당신이야 말로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내가 왜 곤도씨 앞에서까지 고개를 저었는데.”
“안 궁금하니까 설명하지 마.”
“단순히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훨씬 더 위험하고 더 시궁창 같은 임무 잘도 줬으면서 설마 그까짓 호텔가서 하하호호 칼질하는 걸 못할까봐서? 내가 굳이 못하겠다고 대답한 건 그 일이 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건 나에게만이 아니라 신센구미에게 부당하다는 그 말입니다. 히지카타씨 등신이에요? 왜 멍청한 척 굴어!”
평소 언성을 높이는 걸 끔찍하게 귀찮아하던 오키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아이의 손에 부딪혀 등잔이 깨져나갔다. 산산이 조각난 유리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렁대던 호롱불이 꺼지자 방안에는 싸늘한 어둠과 진득한 노성만이 남아 있었다. 손등에 박힌 조각들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스로가 큰 소리를 내는 것엔 관심 없고 오로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에만 소질이 있던 오키타 치고는 굉장히 드문 패턴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감정에 휘말린 오키타와 정 반대로 히지카타는 침묵처럼 가라앉아 서늘하게 화를 냈다.
“궁금하지 않다고 말했잖아.”
이를 갈며 히지카타가 휘두른 발길질 한 번에 탁자가 맥없이 나뒹굴었다. 잉크병이 세차게 바닥을 구르다 오키타 등 뒤의 벽과 충돌하며 파열음을 냈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조각과 함께 내용물이 쏟아져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검게 얼룩지는 벽지와 바닥을 타고 아이의 얼굴은 한층 더 사나워졌다.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며 오키타는 숨을 참았다.
“너야말로 오늘따라 왜 더 천치처럼 굴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겠다고? 아직도 여기가 부슈의 그 작은 도장 같아?”
“그건 척 봐도 알량한 이권다툼 속에 우릴 욕보이려고 내린 임무였어요!”
“시끄러워.”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뒤까지 닦아주는 처지가 됐습니까!”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이를 악문 음성이 들려왔다. 오키타는 숨을 참으며 가까스로 소리를 죽이려 노력했다.
“거절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잖아요. 그 정도는 커버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다른 놈도 아니고 하시모토를 타고 들어온 의뢰였다고요! 텐도슈 뒤에 숨어서 신센구미를 모욕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는 그따위 버러지 놈 말을 들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오키타의 말을 끊으며 저벅저벅 히지카타가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간격을 한 뼘 남짓 남겨두고 다가온 히지카타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숙여 한 음절 한 음절 씹어 삼키듯 오키타에게 내려박았다.
“입 다물어. 대체 언제부터 너에게 건방지게 판단할 권한을 줬지? 그건 곤도씨와 나의 몫이야.”
남자는 위협적으로 고개를 숙여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바닥에 흐트러진 가재도구들의 잔해를 발로 툭툭 걷어 차냈다. 주먹 쥔 오키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모욕적인 언사라도 들은 것처럼 번뜩거리는 눈으로 히지카타를 꼿꼿하게 노려보았다.
“일개 대장 따윈 닥치고 까라면 까야 되는 겁니까? 죽으라면 죽고 박으라면 박고?”
배려없는 빈정거림을 들으며 히지카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피로함이 치덕치덕 묻은 이마를 손등으로 천천히 쓸었다.
“…너한테 그것까진 바라지 않아. 그래서 내가 했잖아. 그런 엿 같은 자리에 죽어도 못나가겠다고 우겨대서 대신 처리해줬더니 대체 뭐가 불만이라고 이 늦은 시간에 날 붙잡고 패악질이야?”
커다란 손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피로와 짜증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적나라한 표정은 귀찮다는 말투까지 더해져서 오키타의 신경을 긁었다. 오장육부가 사정없이 뒤틀렸다. 참지 못하고 그는 한 쪽 문이 열린 장롱으로 다가갔다. 바람에 덜렁거리는 열려진 문짝을 잡더니 어디 풀어놓은 길 없는 분노를 쏟아내듯 무식하게 잡아 뜯었다. 경첩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제법 무거워 보이는 문짝이 종잇장처럼 뜯겨져 나왔다. ‘오키타 너!’ 사나운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울리는 것을 들으며 그는 떨어져 나온 문을 들어 나머지 한쪽 문에 내리찍었다.
쾅. 소리가 나며 마주본 문짝 두 개가 날카롭게 갈렸다.
“미쳤어?!”
문짝을 내리찍자마자 히지카타가 달려와 양손을 붙들었다. 마른 걸레에서 기어이 물기를 쥐어짜내는 사람처럼 그는 힘을 풀어버린 손목을 응징하듯 힘주어 잡았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릴 만큼 히지카타의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오키타는 전혀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뻔뻔한 표정으로 히지카타를 응시할 뿐이었다. 눈동자에는 식지 않는 불길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은근 그 여자가 맘에 들었나보네요. 왜? 어디 막부 요직에 앉은 사람의 따님이라니 좀 끌리기라도 했습니까? 스스로 엿 같다고까지 말하면서 그 여자 따까리 하러 기어들어가는 걸 보면 뭐, 신분상승의 꿈이라도 꿨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그렇다고 말하지 그래요? 비겁하게 핑계 뒤에 숨지 말고. 깨끗한 척 하는 거 신물 나니까.”
오키타의 빈정거림에 히지카타는 드디어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이성을 놓친 기분이 되었다. 개 같은 싸움이 되겠구나. 막연하게나마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을 여과하고 걸러낼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계였다. 필터 없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너야말로 고결한척 고상한척 그만하지 그래? 하기 싫은 일은 안 한다고 어리광 피우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따라오질 말았어야지. 곤도씨가 더러운 일 다 맡아주니까 니가 어디 성인군자라도 된 것 같아? 의적놀이가 하고 싶으면 시골 어귀에서 좀도둑이나 잡으면서 살아!”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 알고 처음부터 그렇게 데려오는 걸 반대했건만. 히지카타는 분노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지만 코앞에서 마주보고 있는 이상 오키타에게까지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를 주고자 악의에 차서 내뱉은 말이었다. 대충 기침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기분부터 의도와 속내까지 줄줄이 꿰어내는 오키타로선 그 악의를 흘려보낼 재간이 없었다. 남자가 원하는 대로 그 진심인지 홧김인지 모를 날카로운 말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서 오키타는 소리 없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눈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같았지만 모르는 척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재수 없습니다. 히지카타씨. 대체 당신이 뭐라고 날 반대 한다 만다야?”
아, 젠장 목소리.
오키타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게도 목소리가 흔들려서 나왔다. 자신의 동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 적에게 약점을 까발리는 꼴이었다. 여길 찌르시면 됩니다, 안내판을 써놓고 배를 까고 있는 모양새가 비참해 오키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이진 않았지만 히지카타도 그 앞에서 절 비웃는 게 느껴졌다.
“너도 지금 네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패악을 부리는지 알고 있지? 안 그래도 오늘 하루 종일 기분 더러웠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서늘한 목소리가 뒷목을 자르르 울렸다. 냉소와 조롱이 섞인 그 음성은 자신의 허울 좋은 자존심을 비난하고 있었다. 여린 살을 도려내며 오키타는 차분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히지카타씨한테 그런 일 하라고 한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책임을… 미루겠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불이익을 받아도 내가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아, 그래. 네가 날 그 자리로 밀어 넣은 건 아니지. 그리고 딱히 너 때문에 자처한 것도 아니니 걱정 하지 마. 난 다만 곤도씨가 꼬투리 잡히는 게 싫었을 뿐이니까. 고릴라는 어차피 너라면 다 오냐오냐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택한 건 내 선택이니까 됐다고 쳐. 네 녀석 그 대단하신 콧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고 어차피 널 그 자리에 앉혀놓은 순간부터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으니 이제와 번복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비웃음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남자의 빈정거림에 섞여서 누구보다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에 박혔다. 가슴께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팠다. 히지카타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너도 이제는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게 좋지 않아? 네가 이렇게 패악을 부릴 때마다, 우리는.”
그는 잠시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하지만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널 데려온 것에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오키타의 역린을 건드렸다.
비꼬는 것도 아니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주지시키듯 평연하고 담담한 그 음성은 정작 당사자에겐 우레를 동반한 폭풍이었다. 오키타는 잠시 숨을 참았다. 습기를 축축하게 머금은 날숨을 목 언저리에 붙들어두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폭동처럼 들고 일어났던 머리는 진압 당해 새까만 재와 불길만이 남아있었다. 이성을 쥐고 흔들던 분노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스멀스멀 저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질척한 감성이 마음을 채웠다.
“…누구 마음대로 곤도씨 생각을 단정 짓고….”
오키타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띄엄띄엄 아무 말이나 주워 삼켰다. 한 걸음 떨어진 히지카타에게도 들릴 듯 말듯 한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히지카타는 오키타가 아작 내놓은 장롱 문을 한손으로 천천히 뽑았다. 제멋대로 동강난 가구의 표면이 거칠었다.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네가 곤도씨를 곤란하게 만든 게 하루 이틀 일이었을 거 같아? 연옥관 때는 네 녀석 단독행동 때문에 실제로 암살 위협까지 받았고.”
“…….”
단어 하나하나가 흉기가 되어 가슴으로 와 박혔다. 상처를 더듬는 기분으로 오키타는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지가 위태로운 사람이 널 감싸느라 어디까지 위험해졌는지 양심이 있으면 궁금해 하기라도 해보는 게 어때?”
히지카타는 화염 같은 눈으로 분을 삭이지 못해 벽을 세게 내리쳤다. 어지간히 참은 모양인지 숨 쉴 틈도 없이 거침없는 칼날들이 쏟아져 내렸다.
“눈만 뜨면 부장자리 달라는 소리나 지껄이고. 그 머리통에는 혼자 잘난 정의감, 네 녀석의 알량한 지위 뭐 그런 것들만 중요하지? 날 죽이고 감투 같은 거 탐낼 시간에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나 직급에 맞게 개조해와. 곤도씨가 왜 훨씬 오래전부터 알아온 너보다 나한테 부국장 자리를 넘겼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세 치 혀는 칼을 품을 듯 신랄하고 서늘했다. 히지카타는 들고 있던 문짝을 제멋대로 팽개쳤다. 종전까지만 해도 제 것이던 물건을 내버리는 손길이 위협적이었다. 오키타를 돌아보는 눈이 새빨갛게 보였다. 히지카타 역시 안전핀은 이미 옛날 옛적에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너 혼자 해. 반항이든 뭐든 우릴 끌어들이지 마. 더 이상 네 개별행동에 신센구미를 휘말려들게 하지 마. 여긴 너보다 약하고 자기 몸 건사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고. 무리란 원래 그런 거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오키타는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손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형태도 없는 말이 이렇게나 구체화되어 사람의 목을 조를 수 있다는 걸 오키타는 그 순간 깨달았다. 가느다란 숨구멍을 통해 간신히 폐가 부족한 호흡을 헐떡거렸다. 단단하게 벼려진 그의 언어들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는 동안 오키타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더듬더듬 여전히 목 언저리를 더듬는 손이 파리하게 떨렸다. 눈앞이 뿌옇게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히지카타는 지금 선을 긋고 있었다. 이 이상 분명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히지카타는 신센구미로부터 오키타를 분리해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방해꾼 취급을 받았다. 달리 해석해 보려 해도 빠져나갈 구멍하나 주지 않은 채로 히지카타는 문을 닫아버렸다.
…분리 당했다.
무수하게 쌓인 흉터들을 헤집어 제가 가지고 있던 가장 깊은 상처를 도려내는 건 아마 히지카타니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칠 것 따윈 없다는 듯 남자는 제가 가진 가장 아픈 부분을 난도질했다. 아무에게나 보일 수 없던 상흔이 집요하게 파헤쳐졌다. 잘 가려두었던 위장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 건 애초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반항 같은 거 아니에요….”
“뭐?”
“…내 나름대로 아끼는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부족한 숨 대신 오키타는 토해내듯 변명을 뱉었다. 간신히 들이마시는 말들은 이미 힘을 잃어 비실비실했다. 처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어떻게 구제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피를 토하듯 간절하게 쏟아낸 건 진심뿐이었다.
“…나는 그저…!”
가느다란 비명이 터졌다. 꼭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오키타는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퍼렇던 눈 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다. 독기와 악만 남아있던 자리엔 어느새 서러움이 그득했다. 비명소리가 물기를 머금었다.
“나는 다만… 내가 아끼고 싶은 범주에 ‘여기’를 넣었던 거라고! 여긴 내 자리니까! 곤도씨와 누님으로만 가득 차 있던 세상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무리를 이루었으니까!”
어느덧 덩치가 커진 그 세상에서 지켜야만 할 사람은 겨우 한 둘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 조롱받지 않았으면 했고 타인에게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긍지를 가졌으면 했고 목적에 어긋나지 않았으면 했으며 누구의 조종도 받지 않기를 바랐다. 제가 욕보는 건 곧 우리를 욕보이는 것과 같았으니까. 우린 훈련된 개새끼들이 아니니까.
애틋함과는 달랐다. 그냥 여긴 집이었다. 오키타에겐 그랬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서러움과 악에 바친 비명은 냉랭하던 공기를 일순 얼어붙게 만들었다. 현기증이 났다. 하루 종일 고여 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모든 게 어지러웠다.
히지카타는 표정을 구겼다. 어딘가 비틀려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난처해 보이기도 했다. 조금 느리게 그는 입을 열었다.
“…지키는 건 내 몫이야. 너에게 그걸 맡길 생각은 없어.”
발악처럼 질러댄 외침에 돌아온 건 냉정하기 짝이 없는 단절뿐이었다. 저만치 저를 밀어내는 손길이 차가웠다.
잠시 정지한 것처럼 멈춰있던 오키타는 이내 주먹을 움켜쥐고 휘둘렀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여유 있게 한 걸음 뒤로 주먹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려 히지카타가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피하리란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는지 오키타의 뒤꿈치가 히지카타 정강이를 걷어찼다.
거리감이 미묘했기에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성인 남성을 넘어뜨리기엔 충분했고, 그 사이 오키타는 몸을 돌려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의 남자와 행여 얼굴이나 마주칠까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잰 걸음으로 나서는 발밑에는 짙은 배신감이 깔려 있었다.
발소리는 한밤을 가르며 점점 사그라졌다. 조용해지는 걸음소리를 들으며 히지카타는 얻어맞은 정강이를 감쌌다. 손이 무릎을 짚었다가, 바닥에 닿았다가 이내 이마로 올라갔다. 너덜거리는 손목으로 이마를 짚으며 히지카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발치가 질척해 시선을 내려 보니 아까 던진 잉크병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다다미, 갈아야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다 발끝을 들여다보니 언제 밟았는지 새까만 물이 들어있었다. 어쩌면 물든 것은 자신의 머릿속이었을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줄곧 시커멓던 그 곳엔 아무것도 새로 들어오질 못했다. 검은색보다 채도가 낮은 감정은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죄다 먹혀버렸다. 블랙홀이 들어앉은 머리에는 줄곧 혼돈뿐이었다. 이 혼란을 안고서도 정상인인척 굴 수 있는 스스로에게 질릴 정도였다.
추악한 욕심과 이기심이 꿀렁거리며 검은 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속이 쓰리다. 발치가 검게 물들었다.
예약기간은 9/9 토요일까지이며, 문의사항은 트위터 디엠(@_esaesa) 혹은 덧글로 달아주세요. 답변은 다소 느릴 확률이 높습니다ㅠ0ㅠ 그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_<)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