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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가져왔게?”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손가락에 들린 물건을 흔들어보였다. 정체를 모를 만큼 생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어울리거나 필요한 건 결코 아니다 보니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는 조금 더 가까이 그것을 가져다댔다.
역시 매니큐어였다. 그것도 질릴 정도로 화사한 연분홍색깔의.
“…뭡니까 이건?”
오키타는 당황한 얼굴로 긴토키가 에게 물었다.
“용도를 묻는 거야? 예쁘게 단장하는 데 쓰이는 물건이지.”
그렇게 말하며 긴토키는 이불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던 오키타의 팔을 잡아 뺐다. 반드시 이걸 네 손에 바르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라 오키타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일 때부터 그게 긴토키의 손에 발리는 일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타깃은 자신인 모양이었다.
“예쁘게 단장하기 위한 ‘여성’들의 물건이겠죠. 여기엔 형씨랑 나 밖에 없는데 누굴 위해서 가져왔습니까? 선물치고는 센스가 없는데요.”
“남녀 차별은 나빠 오키타 군. 아무도 그렇게 정해 놓지 않았는데 통속적인 판단근거로 그렇게 사용자를 한정짓는 법이 어디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긴토키의 얼굴에는 그다지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실제로 뚜껑을 여는 순간 상상하지도 못한 자극적인 냄새에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눈살을 찌푸렸으니까. 아무 말이나 대충 주워섬기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그는 그저 새로운 놀이의 일환으로 그걸 가져왔을 것이다. 오키타는 피식 웃었다.
“오늘은 또 무슨 오기가 부리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
긴토키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뚜껑을 반쯤 연 매니큐어를 내려놓았다. 톡 쏘는 냄새가 보이는 것과 달리 꽤나 독했다. 은은한 핑크의 색만 봐서는 그 향도 꽃향기나 과일향일 거라고 생각하였는데 오산이었다. 화학적이고 무척이나 인공적인 냄새가 금방 방안을 점령했다.
긴토키는 한쪽 다리를 척 들어서 침대골조에 걸고는 꺼내놓은 오키타의 손을 제 무릎위로 올렸다. 가지런한 손톱은 여성들의 것처럼 길쭉하니 예쁜 편이었다.
“심심하잖아.”
“그래서 뭐 소꿉놀이라도 하고 싶어요?”
“굳이 말하자면 니가 엄마 내가 아빠, 하는 가족상황극 이라기 보단 엄마 화장대를 몰래 털어서 어른이 되는 척 하는 탐험놀이가 더 가깝겠지?”
긴토키는 말하면서도 오키타의 손톱을 하나씩 천천히 매만졌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정돈하는 화가라도 된 양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오키타는 어이가 없긴 해도 별로 반항할 생각은 없는지 피식 웃으며 얌전히 그 무릎에 손을 내주었다.
“…손을 그렇게 험하게 쓰는 것치곤 모양은 참 예쁘단 말이지. 굳은살도 필요한 부분에만 제대로 잘 박혀 있고. 손가락만 놓고 보면 여염집 규수 같아.”
“칼 좀 휘둘렀다고 손톱 빠지는 것들이랑 내가 같아요? 어디다 갖다 대는 겁니까. 나는 남들이 아장아장 걸으면서 나이를 무기삼아 애교나 팔고 다닐 때도 도장에서 통나무를 휘둘렀다구요.”
“어릴 때부터 잔머리가 너무 좋아서 요리조리 훈련을 빠져나가는 걸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하던데, 고릴라는.”
“그럴 리가요.”
“말하는 너도 듣는 나도 공갈인 거 빤히 아는데 웬 허세. 소이치로군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와, 은근 맘 상하네. 그런 캐릭터 아닌걸 알면서 왜 안 믿습니까? 자의는 아니었지만 험하게 굴렀던 건 사실이에요. 당시 우리 도장에, 부외자 주제에 되게 거슬리는 놈이 하나 있었는데 어쩌다 경쟁이 붙으면 제살 깎아먹는 짓도 심심치 않게 했거든요.”
“네가 일방적으로 그놈 엿 먹인 거 아니고? 짐작하기론 그 부외자는 곧 죽어도 그런 폼 안 나는 짓 할 성격이 아닌데.”
긴토키는 키득키득 웃었지만 오키타는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여기서 깨지고 저기서 깨지면서 처세술을 배워서 그렇지 그 사람 어릴 때는 성격 정말 별로였어요. 어른들에게 집단 린치 당하면서도 눈알을 부라리던 놈인데. 객기도 심했고 꼬장꼬장함도 더하면 더했지.”
말하는 사이 긴토키는 한참을 어루만지던 손 위로 드디어 붓을 가져다댔다. 잔뜩 묻은 매니큐어 액은 조금 덜어내야 잘 칠해진다는 것을 두 사람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과거 언저리를 짧게 유랑하고 온 오키타는 썩 유쾌하진 않은 기억들 틈바구니에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객식구 주제에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한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난 진심으로 그 자식을 싫어했는데 아마 그 쪽도 마찬가지였겠죠. …아 좀 잘해 봐요, 넘치잖아.”
핑크색 액체가 손톱 가득 쏟아졌다. 손톱이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양의 액이 발라지자 붓이 안쪽으로 밀릴수록 모양은 거듭 이상해지고 있었다. 긴토키의 손은 수전증을 보이며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아무튼 우린 사이 진짜 별로였어요. 미운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도 아마 에도로 올라온 뒤에야 조금씩 생겼을 걸요. 지금 괜찮아졌다고 해서 그때 그렇게 험악했던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가끔 생각하면 마음이 싸하게 가라앉기는 하죠.”
“…너희들 관계는 들을 때마다 구제불능 같아. 음험하고 복잡하고 이중적이야.”
하핫. 오키타는 의미 없이 소리 내서 웃었다.
“딱히 반박할 말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좀 심한 거 아니에요?”
“하여간 주변에 머리를 쓰는 인간들이 없어서 다들 너네를 겉으로만 사이 나쁜 절친쯤으로 보는 모양이지만, 눈치가 조금만 있으면 모를 수가 없지. 둘이 붙어 있으면 그 주변 공기가 불길해.”
긴토키를 묵묵히 바라보던 오키타가 눈꼬리를 접으며 모르는 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야, 순진한 척 하지 마.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둘이 아주 똑같아. 넌 장난인척 포장하고 그쪽은 신경 안 쓰는 척 허세나 부리고. 신센구미에는 곰탱이들만 모아놨나.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나라면 기분 나빠서 늬들 사이에 절대 안 껴.”
“하긴 뭐…. 하나같이 우직하고 단순한 사람들이긴 해요. 적이 아니면 무조건 다 친구라고 여기는 것만 봐도 알만 하죠. 눈칫밥 먹으면서 자란 건 나뿐이라 그래요.”
어느새 손톱은 벌써 절반이 진하게 물들었다. 삐뚤삐뚤 제멋대로 삐져나온 게 대부분 이었지만 그래도 투명하던 손톱에 색이 입혀진다는 건 생각보다 강렬한 시각적 자극으로 다가왔다. 무게중심이 손가락 끄트머리 쪽으로 쏠려서 어쩐지 안정적이었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집중해서 다듬으며 긴토키는 말했다.
“네가 무슨 눈칫밥을 먹어. 고릴라 특제 낙하산 주제에.”
“모르는 소리 마요. 바로 그 고릴라가 시시때때로 날 내쫓고 싶어하는 장본인입니다.”
“너를 왜? 사고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재고 따져보면 제법 유용하다는 쪽으로 바늘이 기우는 인력인데.”
“어리다고요.”
“…….”
긴토키는 손을 잠시 멈추고 오키타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아이는 무슨 표정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이런 늑대집단에 아직 어린애를 뽑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위인이에요. 신센구미에서 내 또래 애들 본 적 있어요? 곤도씨는 아직까지도 신참 뽑을 때 내 나이 비슷한 애들이 오면 돌려보내요. 내가 바로 살아있는 커트라인이라니까?”
“…그게 뭐야.”
“형씨가 생각해도 이상하죠? 난 계속 나이를 먹고 있는데도 곤도씨한테는 여전히 어린애일 뿐이에요. 어린아이의 범주가 나로 인해 해마다 늘어나는 걸 보면, 음… 생각보다 사고가 유연하지 못한 사람인가보다 싶으면서도… 그게 또 그 사람만의 좋은 점이기도 하니까….”
“왜 말을 흐려.”
“…관계라는 게 그런가 봐요. 한 번 고정되어 버리면 쉽게 바뀌지 않는 거. 누나한테는 내가 마지막까지 부모 없이 자란 가여운 동생이었던 것처럼. 곤도씨한테도 내가 마지막까지 데리고 다니기 미안한 어린애겠죠.”
왼손은 벌써 다섯 개가 모두 칠해져 있었고 긴토키는 세심하게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조금 어려워요. 그 사람에게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마냥 순진한 사람한테.”
더듬더듬 오키타의 말은 느리게 이어지다가 결국은 멎어버렸다. 손톱위로 뭉개지는 붓에서 인공적인 핑크색이 자꾸만 두껍게 덧칠해졌다. 봄 향기를 느끼기엔 그 색은 너무도 자연적이지 못했고 아찔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긴토키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쪽은 진하고 한쪽은 연한 못생긴 결과물들이 줄을 지었다.
마지막 새끼손톱은 유독 얇고 길어 붓 칠 한 번 만에 빈공간이 깔끔하게 메워졌다. 긴토키는 긴 작업을 마친 후유증처럼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눈을 두세 번 깜빡거렸다.
오키타는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고운 색이 칠해진 열 손가락으로 시선을 물끄러미 내렸다. 긴토키의 무릎 위에 자리 잡은 양 손은 마치 여자처럼 가지런하고 단정했다.
“모르겠으면 그냥 말하지 마.”
매니큐어 뚜껑을 닫으며 긴토키가 툭 내던지듯이 말을 뱉었다. 말가니 손끝을 바라보던 오키타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긴토키는 다시 한 번 더 덤덤하게 말했다.
“…동정 받는 것도 싫고 그놈들이 너 때문에 우는 것도 싫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용기도 없잖아.”
“…….”
“그냥 나랑 사랑의 도피라도 한다고 해.”
오키타는 푸스스 웃었다.
“형씨도 참 이상한 구석에서 무르네요.”
“왜.”
“화 안내요? 남에 집에 들러붙어 도망질이나 치고 있는데. 나였으면 썩 내쫓았을 텐데 자기 침대까지 내주고. 종일 옆에 붙어서 이런 장난도 해주고.”
손가락 끝이 꿈틀거렸다. 눈으로 보기에는 1미리도 움직이지 않아 알아챌 수 없었겠지만 긴토키는 무릎 위의 미약한 진동을 통해 오키타가 손끝에 힘을 주었다는 걸 눈치 챘다. 두어 번 더 손끝이 흔들렸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녀석의 고동이었다. 긴토키는 가지런하게 모아진 양손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가느다란 팔목에선 죽음의 냄새가 났다.
천천히 그 손등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벼락 맞을 자식. 나한테 이런 거 바라고 찾아 온 주제에 화가 안 나냐고 묻는 거야 지금?”
“…우문인가요? 그래도 그냥 듣고 싶어서요.”
“하…, 너희 남매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시련을 주는데.”
부스스한 은발이 자신의 손등에 얹혀서 흔들리는 걸 보며 오키타는 세게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에 에일 듯이 반짝반짝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보였다.
“형씨는 나한테… 비현실이에요. 눈 감았다 뜨면 꿈처럼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아요.”
오키타는 손가락 하나라도 가져다대면 바스라질 것처럼 웃었다. 긴토키는 고개를 들어 그 얼굴과 마주하였다. 말문이 막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을 열면 말 대신에 통곡이 나올 것 같았다.
붙들린 손끝에서 봄바람 하나 없는 작위적인 연분홍이 흩날렸다.
인공적인 색소가 시체위에 덧발라져 생기를 위장하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져 내렸다.
평소라면 절대 허락할 리가 없었다. 비록 애늙은이처럼 굴고는 있어도 알맹이를 까보면 어쩔 수 없는 십대 남자아이였으니까. 더더구나 근육 마초들 사이에서 자란 직업마저도 칼잡이인 녀석은, 고지식하고 치기 넘치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제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을 보면서도 가만 웃으며 수다나 떨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홍색 우산조차 계집애처럼 보인다고 쓰지 않으려드는 이제 겨우 스물도 안 된 치기어린 사내 녀석이었다. 이런 장난질 원래대로였다면 질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을 게 뻔했다.
“형씨한테도 못 할 짓 하고 있는 거 알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 못하는 건, 그냥 내가 나약해서 그런 거니까…. 내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당신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요. 만약 힘들면 그만 갖다 버려도 괜찮아요.”
“…….”
“날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요.”
긴토키는 팔목을 들어 눈을 가렸다. 겨우 뱉어낸 말에는 쇳소리가 섞여들어 기괴한 음성으로 변했다.
“안 그러면 안 되냐…”
“…….”
“…죽지 마, 제발….”
“…울지 마요…. 매일 그러니까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아는 녀석이 나한테 왜 그래.”
“갈 곳이 여기 밖에 없어서… 의지할 곳이 당신 밖에 없어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나는 형씨가 날 내버리면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고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잖아요.”
오키타는 이제 팔은커녕 손목까지도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 발끝에서 시작된 마비는 벌써 팔다리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너는 생각조차 안했겠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물 먹은 솜처럼 마음이 젖어들었다.
“신파치도 가구라도 독립해서 사무소를 나가게 되면, 언젠가 너를 데려오고 싶었어.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힘내야 하는 그 인간 옆에서 빼내서… 니가 좋아하는 당고가게나 차릴까 아니면 한적한 시골에서 밭이나 갈면서 살까… 내 마음대로 미래도를 그려보고….”
“…형씨….”
“그 안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 했었어….”
눈물이 가려진 틈 사이로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흠뻑 젖은 손목 사이로 그의 떨리는 눈꺼풀이 보였지만 오키타는 그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보 같다고 웃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따라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너무 서럽게 엉엉 울어서 참지 못하고 함께 통곡을 하며 맞는 삶의 끝자락이었다.
※ 연령조작 AU.
평평한 돌 위에 자리 잡은 더벅머리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뜨끈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그는 눈부신 기색하나 없이 지루한 표정이었다. 반쯤 풀린 동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음료 캔을 대충 한쪽 팔에다 끼우며 오키타는 손바닥에 흥건한 물기를 옆구리에 슥슥 비벼 닦았다. 자판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찬 음료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탓이었다. 날이 벌써 이렇게나 따뜻해져 있었다.
돌덩이 위에 어정쩡한 자세로 발을 붙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제대로 된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보이지 않는 한숨과 함께 생각했다.
응.
오키타는 옷자락에 문대져 표면의 물기가 뭉그러진 캔 하나를 내밀었다. 탄산음료였다. 남자는 탭을 따고서 캔의 바닥을 돌 위에 톡톡 두드렸다. 안에서 뽀그르르 소리가 나며 기포가 터졌다. 탄산음료는 목이 따가워 싫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멋대로 음료를 사온 까닭은 적어도 남자가 음료를 마실 수 있을 만큼 탄산이 다 빠질 때까지는 그곳에 붙들어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콜라는 절대 싫어도 과실음료보다 더 달아빠진 김빠진 단물은 좋아하는 괴이한 식성이었다.
바닥에 두드릴 때마다 캔의 입구에서 꼬르륵 기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키타는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으로 가져온 오렌지주스를 땄다. 하필 직사광선이 머리위로 바로 드리우는 자리였다. 옆자리로 옮길까 싶다가도 무표정하게 음료의 탄산 빼는 것에 주력 중인 그를 보고 그만두었다.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여 머리칼 속으로 한쪽 눈을 대피시키자 하늘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듬성듬성 구름마저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광장은 부러 피했기 때문에 화려함은 덜했지만 그래도 공원은 공원이라 벚나무가 많았다. 초록보다도 하양과 분홍이 많아지는 유일한 계절이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또 조금씩은 제각각인 연분홍 가지들이 얼기설기 눈앞에 가득했다. 구획 없이 마구잡이로 심어진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데?”
한참 다섯 잎이 모두 온전하게 붙어있는 벚꽃의 개수를 세고 있던 오키타의 옆에서 불쑥 말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 캔을 흔들며 기포를 빼는 그의 손이 분주했다. 음료가 행여나 쏟아질세라 시선은 거기에 고정시켜놓고 남자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여기 앉아서 뭘 어떡하면 되냐고.”
딱히 빈정거리거나 시비조의 말투는 아니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그래서인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역시 데리고 나오는 게 아니었나.
“그냥 아무것도.”
대답하자 시선이 그제야 오키타를 향했다. 꿈벅꿈벅. 멍한 기색의 눈이 느리게 두어번 깜빡였다. 의미 없이 시선을 맞추고 있다가 들고 있던 주스를 마시자 상대방도 따라서 음료를 한 모금 물었다. 아직 원하던 수준이 아니었는지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목울대가 울리며 음료를 삼킨 건 조금의 간격을 두고서 이루어졌다.
오키타는 무덤덤하게 나무를 가리켰다.
“맛있는 걸 사들고 와서 가만히 앉아 저걸 보면 되는 거야. 질리면 음식을 먹기도 하고. 술을 마신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다시금 손목을 열심히 흔들며 그는 벚나무를 노려보았다.
“계속 보고 있다 보면 기분이 짜릿해져?”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그가 물었다. 흘끗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는 게 어떤 의미의 질문인지 순식간에 파악되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래봐야 나무이고 예뻐 봤자 꽃인데. 남자의 표정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차원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배를 채우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채우는 것도 아닌데, 그럼 너무 무의미한 행위 아냐?”
꽤 타당한 지적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행위, 라. 오키타는 소리 내어 그 말을 반복했다. 애초부터 자신도 그렇게 감성이 충만한 청소년이 아니었던 터라 꽃놀이의 순기능과 의미에 대해서 적절하게 납득시킬 자신 따윈 없었다.
남자가 이런 행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다. 분명 그건 아니었지만. 연일 뉴스에서 지껄이던 개화소식이라던가 들뜬 주변인들의 분위기가 오키타를 초조함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관심 없는 사람마저도 어떻게든 한 번씩 듣게 될 만큼 여기저기서 벚꽃의 만개소식이 넘실거렸다. 우습지만 감수성 같은 건 개나 줘버린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내민 건 책임감이란 놈이었다.
이런 이벤트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소외되어있을 인간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그 소외된 본인은 몹시 당연히 쓸쓸함 같은걸 느낄만한 중추 자체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다는 그를 깨워 밖으로 나오면서도 과연 꽃놀이가 그와 어울리기나 할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기만족이었다. 예쁜 걸 보여줬다는 자기만족.
들고 있는 캔을 반쯤 비우며 오키타는 입을 열었다.
“하는 짓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을수록 사치스러운 인생 같잖아.”
화사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건 본능에 가까운 행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짓이었나 보다.
오키타는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맞추는 그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기에 그냥 모르는 채로 두기로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우수수 가지들이 흔들리고 매달린 꽃잎들이 하늘하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눈앞 가득 흩날리는 연분홍 이파리들은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다. 감탄사가 작게 터져 나왔다. 아, 예쁘네.
“예뻐?”
바로 옆에서 긴토키가 물었다. 오키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캔을 들어 음료를 비웠다. 흐응. 옆에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낸 긴토키는 훌쩍 앉아있던 돌에서 뛰어내렸다. 줄곧 흔들고 있던 탄산음료는 아직도 한 모금 밖에 줄지 않았다.
바람은 어느새 멎어있었고 흩날리던 꽃잎들은 다소곳하게 바닥에 융단을 깔았다. 고요하고 인적 드문 그곳에서 오키타는 남자가 하는 요량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어슬렁 나무들 사이로 들어간 그는 천천히 품평하듯 벚나무들을 훑어보았다.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눈이 개중 단단하고 커다란 나무 하나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쾅. 그의 발이 나무 밑동을 걷어차는 건, 바로 그 다음순간 벌어진 일이라 말릴 새도 없었다.
굵고 거대한 나무가 잘게 몸을 떨며 매달려있던 약한 이파리들이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날렸다. 몸을 앞뒤로 뒤집어가며, 마치 유영하듯이 부드럽게 공기를 가르는 수 십 개의 연분홍들이 깃털처럼 가볍게 날렸다. 중력을 거스르기라도 할 것처럼 무게감 없는 그 작은 꽃잎은 반짝이는 햇살들과 만나 봄을 노래했다.
나무 기둥에 한쪽 발을 비스듬히 올리고서 여전히 건방진 자세로 선 그에게로 시선을 주자 말끄러미 시선이 얽혀들었다.
예뻐?
묻고 있었다.
굳어있던 입매가 스르륵 녹아내리며 오키타는 부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면서 웃자 긴토키는 다시 한 번 나무를 흔들어 꽃비를 내렸다. 하얀 머리칼, 느슨한 옷자락이며 어깨 등 팔뚝 할 것 없이 온통 꽃잎을 뒤집어 쓴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바닥에 융단을 깔았다. 살며시 걸음걸음마다 그것들을 밟으며 오키타는 빙글빙글 돌았다. 차갑지 않은 빗속을, 푹신한 바닥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 그의 표정도 어느새 조금 물러져 있었다. 춤이라도 한 바탕 추는 것처럼 오키타는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문득 꽃 속에 파묻힌 그의 모습이 언젠가의 기억과 겹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입으나 마나한 낡은 갑주를 대강 얽어맨 채로, 피를 잔뜩 묻힌 그와 눈이 마주쳤었다. 무료한 눈빛과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딱딱한 입매를 가진 남자였더랬다. 마치 무기질의 무언가를 마주한 것 마냥 비어버린 그의 눈에선 아무것도 읽어지지 않았다.
피를 한가득 뒤집어쓰고서도 차디찬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는 지금 흐드러진 벚꽃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
마음까지 모두 데리고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는 시뻘건 구덩이가 아니라 꽃을 밟고 있는 것이다.
마냥 신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푸르고 하얀 녹음들에 둘러싸인 채로는 어쩔 수 없이, 비록 매일 밤 떨쳐내지 못하는 악몽을 꾸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별수 없이 조금은 사치스런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봄의 한가운데였으니까.
오키타는 소리 내어 웃었다.
※ 사망소재 주의.
발 아래서 물기를 머금은 꽃잎들이 뭉그러졌다. 살아생전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이들이 물에 젖어 다소 지저분한 모양새로 뭉개져있는 걸 오키타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봄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었다. 진흙과 뒤섞인 연분홍의 꽃잎들은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걸 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마감한 듯 보였다.
꽃 같다고. 찬란하거나 사랑스러운 것에 대한 수식어로 사용되는 마냥 예쁘기만 하던 식물조차도 죽음 뒤엔 이렇게나 하잘 것 없어지는 법이었다.
빗물이 만들어낸 흙탕 속에 또 다시 살포시 내려앉는 벚꽃 잎을 보며 오키타는 심상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하물며 살아 숨 쉬는 동안 내내 부수고 망가뜨리던 인간이라면 말해무엇할까. 발밑에서 짓이겨진 꽃잎보다 몇 배는 더 보잘것없고 추저분할 것이 틀림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팔딱거리는 생동감 하나를 제외하고서는 봐줄 것 없는 존재들을. 그 유일한 아름다움마저 빼앗긴 사람을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데.’
오키타는 무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꺼멓게 타버린 대지 위로 내리는 꽃과 비가 천천히 발치를 비껴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사건현장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시체들과 부상자들이 뒹굴어 참혹하던 땅은 어느새 고요 속에 잠들었다. 거뭇거뭇한 화재의 흔적만이 남아 폐허가 된 그곳을 위로하였고 살아남은 꽃나무들은 가지를 흔들며 빈터를 조금씩 덮어들고 있었다.
미처 수거하지 못한 잔해가 눈에 띄었다. 안쪽으로 크게 휜 손바닥 만 한 철판이었다. 저렇게 육중한 고철덩어리가 하늘을 난다고 할 때부터 수상쩍었지. 스치는 생각에 오키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신없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보고를 하던 대원들에 의하면 원인은 아마 기체 결함 쪽으로 기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확한 사고경위는 보다 정밀한 조사 후에야 나올 것 같다던 그들의 말을 들으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현장 속에서 홀로 멀뚱히 선 오키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들 가운데에서 오키타는 차마 목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승객 숫자도 다 파악하기 힘든 대형 비행선이 추락했다. 벌써 이주도 넘게 지난 일이었다. 기체는 머리 쪽부터 수직으로 떨어져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고, 하필 여객용 비행선이었던지라 인명피해가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화마에 휩싸여 시체조차 발견하지 못한 사망자가 부지기수였다.
오키타는 천천히 기체의 잔해들 사이를 피해 걸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부스러지는 빗방울이 사위를 메웠다.
마지막이 어땠더라. 우린 대체 무슨 이야길 했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시시한 소리나 지껄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아쉽냐면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인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다음에 또.’ 계단난간에다 턱을 괴고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곁을 떠나버릴 줄 몰랐더랬다. 마지막인줄 모르고 마지막을 그렇게 시시하게 흘려보냈다.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든다. 언제나처럼. 예외 없이.
오키타는 천천히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팔을 모으고 턱을 괴자 머리가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머리칼은 이미 표면에 이슬이 맺혀있던 소맷부리를 축축하게 적셨다.
눈앞이 흐려지며 아무도 없던 자리에 느리게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무뚝뚝한 얼굴을 한 남자가 문득 우두커니 오키타의 앞에 나타났다.
보고 있는데도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은 기억의 잔상을 불러일으켰다.
‘형씨.’
무서우리만치 표정이 없는 남자는 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내말 안 들려요? 역시… 유령?’
힘 없는 한숨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나 진짜 중증인가 봐요. 오키타의 목소리는 그에게까지 닿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얼굴을 잔뜩 젖은 옷자락위로 파묻으면서도 오키타는 울지 않았다.
‘왜 아직도 안가고 여기 있어요. 설마 길이라도 잃은 겁니까. 아니면 혹시, 내가 붙잡고 있어서 못 떠나는 거예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히면서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듣지 못하는 상대를 두고도 오키타는 잠시 침묵했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다 기쁘다 즐겁다 심심하다. 단순하고 일차원적이던 그의 감각에 이제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이 아프다는 감정이 섞여들었다. 저를 볼 때마다 늦되었다고 늘 말하곤 했던 사람이었다.
‘형씨. 그때 누나 장례식 때 했던 말 기억해요?’
오키타는 듣지 못하는 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대원들이 모두 돌아간 새벽 무렵 그는 평소 딸려있는 군식구들 없이 홀로 찾아 왔었다. 불도 켜지 않고 사진 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오키타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평소 입던 이상한 문양의 유카타를 단지 단정하게만 정돈했을 뿐인 몹시도 조문객답지 않은 차림이었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오키타에게 넥타이 한 번 푸르게 해달라는 둥 저속한 소리부터 다짜고짜 내뱉었다. 어이가 없어서 한소리 하려는 차에 그는 조문이 아니라 널 보러왔노라고 투덜거렸더랬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손님이 아닌 너의 손님이니까, 향은 내일 다른 녀석들도 모두 함께 와서 올릴 거라고 말한 긴토키는 자연스럽게 오키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밤새 지치지 않고 수다를 늘어놓다가 해가 뜨기 직전 사라졌다.
오키타는 그날로 돌아간 듯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담백하게 말했다.
‘그날 밤에…. 충분히 호사스러운 이별이었다고,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때 나는 둘도 없는 개소리라고. 병사나 사고사나 전사나 어차피 똑같은 죽음일 뿐인데 호사스러울 게 다 뭐냐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에게 호사로운 이별이더라고요.’
‘마지막을 바로 곁에서 지키면서 손을 마주잡고 유언까지 빼놓지 않고 들으며 보내줄 수 있었던 마지막이라니. 정말 그녀는 이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다정한 사람이었죠. 나는 심지어 한가득 배려 받으며 완결 지어졌던 이별에도 그렇게 힘들고 아파서 몸부림을 쳤던 거네요. …그땐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직업이 이렇다보니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랬는데도 몰랐어요. 나 생각보다도 엄청 무정하고 나쁜 새낀가 봐요. 이제야 느끼는걸 보면.’
오키타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는 긴토키는 천천히 움직여 오키타의 앞에 주저앉았다. 바닥이, 더러운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오키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나 풀려있던 동공은 여전히 풀린 채로 얼음물을 뒤집어쓴 마냥 차가운 표정이었다. 눈 한쪽이 싸하게 아려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형씨.’
답은 없었다. 시선조차 향하지 않는다.
‘있잖아요, 형씨. 내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들어주면 안돼요?’
답이 없는 상대를 향해 오키타는 팔을 뻗었다. 만지면 사라져버릴까 차마 손가락하나 대지 못하고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지만 그래도 손을 오므려 조각상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는 그의 눈을 감겨주는 시늉을 했다. 빗방울이 조금 굵어져 눈이 시릴 것 같아 걱정이었다.
‘마음의 공명이나, 뭐 그런 거 안 되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못 한 얘기가 너무 많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후회할 거 같은데.’
‘말한 적 없어서 몰랐겠지만 좋아해요. 히지카타씨보다 조금 더. 매일 그쪽 찾아가고 자고 치대던 거 다 좋아해서 그랬던 거예요.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속정이 들었다느니 뭐니 그런 소리 하지 말걸 그랬어. 순서 완전 반댄데.’
‘그래도 귀찮아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형씨 내말 들려요? 나 받아줘서 고마웠어요. 가진 건 자존심뿐이라, 다 버려도 그거까지 버리면 내가 비어버리는 줄 알아서 솔직해 본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너무 어린애 같았네요.’
‘이제와서, 당신의 마지막에 내가 그렇게 남는 게 싫다고 해도…. 어린애의 투정 같겠지만…. 형씨 이건 그래도 내 정말 진심인데…’
긴토키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힘없이 팽개쳐져 있던 손바닥 위로 꽃잎이 흔들흔들 내려왔다.
‘미안해요.’
거의 애원처럼 흘러나온 말에 그가 대답했다.
“……너는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오키타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오키타를 지나쳐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지독한 배신을 당한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사는 것도 정말 지랄같이 살더니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렇게 지랄 맞게 가냐.”
‘미안해요.’
“시체도 못 찾았단다. 결국 어제 아무것도 안 넣은 무덤을 두고 장례식까지 마쳤어. 니 이름 밑에는 시체도 뼛조각도 잿더미조차도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 안 들어갔어. 그래놓고 묘비는 세우더라? 웃기지도 않아.”
‘들어줘요.’
“이건 너무 하지 않냐?”
‘한 번만 내 말 들어줘요.’
“예고는 있어야지. 호사까진 안 바라도, 적어도 불길한 예감정도는 있었어야 되는 거 아냐? 왠지 그날따라 보내기 싫었다던가, 말짱한 컵이 깨진다던가, 아니면 신발 끈이라도 끊어져야지. 이게 뭐야. 난 그날 아무것도 못 느꼈어. 아무렇지도 않게 작별인사를 했다고. 또 보자고…”
‘이런 이별 겪게 해서 미안해요.’
“그게 마지막인사라니. 너무 시시하잖아. …거짓말 같잖아. 좀 더 예의를 갖춰주면 안 되는 거였냐. 우리가 그래도 그간 든 정이 있는데. 넌 애가 어떻게 언질도 없이…. 이렇게 훌쩍 떠나버릴 수가 있어.”
툭. 툭.
봄비에 섞여서 질척한 흙바닥위로 온도가 다른 물방울들이 섞여들었다. 긴토키는 허리를 숙였다. 굵은 눈물방울이 발치로 쉼 없이 떨어졌다. 오키타는 푹 꺾인 그 등에 뺨을 가져다댔다.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봐도 느껴지는 온기는 없었다.
“한 번만 나타나면 안 되냐. 인사만 할게. 아니 그냥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까.”
‘…….’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얼굴보고 말도 섞고 인사도 나눴는데. 네가 갑자기 없다고 하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호사로운 거 못해줘서 미안해요. 이런 일,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을 텐데….’
“너무하잖아.”
‘하필 당신에게 이런 이별 만들어줘서. 그런데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요.’
“…너 거기 있지? 사실은 내말 다 듣고 있지? 뭐라고 말 좀 해봐.”
흙바닥에 섞여 들어가는 눈물방울들이 섧고 아파서 오키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묶여서 자꾸만 그가 돌아오게 되는 꼭 2주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