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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오키] Anxious

#이사 2016. 7. 10. 02:25



하아. 입 밖으로 나온 숨은 금세 얼어붙어, 하얀 김으로 날아올랐다. 입김을 따라 올려다 본 하늘은 비라도 쏟아질 듯 어두웠다. 날이 많이 추워졌어, 쓸쓸한 혼잣말을 삼키며 긴토키는 넉넉한 소매에 양 손을 끼워 넣었다. 차가운 손을 반대편 손목의 온기로 녹여가면서 그는 얇은 유카타를 펄럭거렸다. 그나마 해결사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문득 눈에 들어온 신파치의 목도리를 두르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보송한 털실뭉치에 코끝을 파묻었다. 성기게 얽혀서 구멍이 숭숭 난 것 같아 보이던 목도리는 생각보다 따뜻해서 긴토키는 만약 그 녀석이 언제와 같이 목덜미를 훤히 내보이며 나타난다면 이거라도 빼서 둘러줘야겠다고 얼핏 생각하였다.



계절은 게으름 없이 꾸준히 흘러 어느새 낙엽들이 모두 흙더미에 파묻혀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초겨울이었다. 그리고 그 초겨울에 대비하지 못하고 늘 입던 홑겹의 얇은 유카타를 걸친 긴토키는 벌써 30분도 넘게 바깥에 서서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입에서는 연신 스스로를 구박하는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대체 누구에게 원인을 돌려야 하는지도 모를 헛헛한 기분을 밟으며 긴토키는 다리를 쭉 펴고서 벽에 기대었다. 발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서 돌아보니 아까부터 주변을 뱅글거리며 맴돌던 갈색 고양이가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털을 고르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홀로 나타난 아직 어린 고양이는 서투르게 꼬리를 말고 얼굴을 앞발로 부비적거렸다.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서투른 몸짓이 떠올라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숨이 또 한 번 흘러나와 시야를 흐리고 사라졌다. 가벼운 소동을 정리하러 나갔다더니 기다리는 녀석은 당최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추운 걸 꽤나 못 참는 편인 그가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전부 그 라디오가 문제였다.



아니, 기계가 무슨 죄가 있을까. 굳이 따지자면 그 라디오에서 나온 사연 때문이었다. 따뜻한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시간을 죽이려 듣던 낡은 라디오에서 나온 사연은 긴토키를 무작정 길거리로 내몰기에 충분했다.



칼자루에 음악 플레이어며 라디오까지 달려 나오기도 하는 이 최첨단 시대에 그가 벽장을 뒤지다 발견한 건 집에 도둑이 들면 때려잡기 안성맞춤인 흉기 같은 고물 라디오였다. 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처박혀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고물을 긴토키는 요모조모 뜯어보며 그것을 언제 주워왔던 것인가 고민해보았다. 설마 돈 주고 사온 건 아니겠지.



짧은 웃음과 함께 그는 구시대의 유물 같은 옛날 라디오가 퍽 신기해서 거실로 가져가 먼지를 털어냈다. 라디오는 전원을 연결하자 탁한 노이즈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전파를 잡아내는 기능은 녹슬지 않은 듯 보였다. 망가졌을 것 같이 생긴 주파수 조절 버튼도 용케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보자 왠지 그 자리에 앉아서 방송을 들어줘야 할 기분이 들었다.



‘아, 왠지 이 아가씨는 목소리가 좋은데.’



긴토키는 개중 그나마 선명한 주파수에 버튼을 맞춰두고 나른한 고개를 탁자에 뉘었다. 나긋한 여 DJ의 목소리가 공기 중을 부유하며 떠돌았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거실에는 이미 그것 말고도 잡동사니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전부 주말의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못하던 그가 미뤄두었던 벽장을 청소하며 나온 것들이었다. 오늘의 그는 굉장히 부지런했다. 가구라를 신파치에게 맡겨두고서 신년도 아닌데 대청소를 하고 있을 만큼.



물론 부지런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마음의 문제였지 실제로 사무실이 깨끗해졌느냐 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여기저기 가재도구와 청소용구가 뒤엉켜 있었다.



「다음은, 익명H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나태한 공기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계는 아직 2시도 지나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DJ는 한껏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애인이 요새 예전 같지 않아요, 라는 꽤나 안쓰러운 서두로 시작한 그 사연은 자신은 그대로인데 상대방이 서서히 권태를 느끼는 것 같다는 그렇고 그런 사랑고민이었다. 구구절절하던 사연을 처음 들을 때만 하여도 긴토키는 댁이 그 시간에 애인한테 전화는 않고 라디오에 사연이나 보내고 있으니까 권태기가 오는 거라고 시니컬하게 무시 하였더랬다. 주말을 화창하게 달래주기엔 전파를 타고 있는 건 지나치게 흔하고 시시껄렁한 사랑 놀음 이였다. 이번 주말도 텃네, 텃어 하고 긴토키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구시렁거렸다.



「자 그럼 가뜩이나 청취율도 바닥인 이런 방송에, 구질구질함까지 덧칠해 준 익명의 H님의 사연을 자세히 파헤쳐 볼까요? 청취자 여러분, 당신의 연애는 지금 무사하십니까.」



권태기 그런 건 저기 공원에서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붙잡고 파르페나 한잔 하자고 작업 거는 재활용 폐지들이나 겪는 거 아니겠어? 긴씨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



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는 말과는 다르게 긴토키의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익명님 사연을 보니, 정말 딱 권태기의 정석이네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상대방은 벌써 오래전에 권태기에 접어들었어요. 전화도 먼저 않고, 만나자는 말도 않고, 기껏 만나면 잘 웃지도 않고, 게다가 세상에 하루에 세 번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는 커플이 존재 할 수나 있는 건가요? 그리고 만나자마자 데이트도 없이 바로 베드인 이라니. 분명 상대방의 목적은 당신 몸이네요. 그나마 쥐꼬리만큼의 테크닉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연애생명을 질기게 붙들고 있는 게 분명해요.」



“…….”



「하지만 벌써 일주일 째 연락 두절이라니, 드디어 상대방도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딱 보니까 거긴 마음이 이미 떠났어요. 글러 먹었어요. 지금쯤 헤어지자고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을 겁니다, 아마.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분명 3일 뒤에 문자로 해제 통보를 받겠죠. 가여운 익명님. 힘내세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ㄲ…」



뚝.…… …… …….



라디오 밖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저주를 뿌리는 목소리는 긴토키의 손짓으로 순식간에 다시 본래의 상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힘이 들어갔는지 전원 버튼을 누른 손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라디오를 꺼버린 손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낯에는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수심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아니 왜, 난 아무렇지도 않아. 흥미진진하기만 한데. 요 독설가 아가씨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하든지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애써 중얼거리는 긴토키는 한참을 멎은 듯이 그 자세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다가 다시 왼쪽 오른쪽을 살피기도 하고 휘청거리는 머리를 몇 바퀴 돌리고 나서, 결국에 그는 한숨을 또 다시 내쉬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거실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벽장에는 그냥 괴물이 살도록 두었어야 하는데 대체 자신이 왜 어울리지 않게 그곳을 들쑤시고 있는 것인지.



대체 왜 이렇게 주말이 느리게 흐르는지 그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 저 언저리에 방치해 두고 있었을 뿐. 애써 잘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둔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분명하게 저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자라나고 있었다. 봐도 못 본 척 있어도 없는 척 하는 것이 특기인 남자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능하면 최대한 미뤄보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건, 자신이 불과 십분 전에 비웃은 사연의 주인공과 같은 이유였다. 그놈의 같잖은 자존심이 뭐길래. 심지어 툭 까놓고 애인에게 요즘 권태기냐고 묻지 못하는 익명남보다도 조금 더 구저분한 사정이었다.



하지만 그 방치해둔 불편한 진실을 슬슬 거두지 않으면 그는 점점 더 헤어 나오기 어려운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 뻔했다.



하나씩 머릿속으로 사실을 정돈해 나가던 긴토키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고민에 쌓인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결국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낸 그는 다시금 라디오를 틀었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뽀얀 먼지만큼 그가 내쉰 한숨 역시 부옇게 쌓여있었다.



「중요한 건, 신선함입니다. 신선함! 평소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함께 해보세요! 새로운 장소에게 만나는 애인은 새로운 기분을 들게 해줄 겁니다. 이도저도 안되면 그냥 포기하세요. 당신과는 인연이 아니구나 하고 털어버리세요! 세상에 여자가 그녀 한명 뿐인가요 뭐. 이미 질렸다는 상대방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필요가 꼭 있겠어요? 헌 옷은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제 전화번호는…」



뚜….



이 아가씨가 아까부터 방송 참 험하게 하네.



그의 손은 이번엔 주파수를 맞추는 버튼을 돌려버리고 있었다.



긴토키는 혀를 차며 시끄러운 노이즈만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노려보았다. 권태. 권태기. 권태로움. 싫은 단어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깔깔깔 비웃고 있었다.



잘되었다. 매일 저 좋을 대로만 하더니 꼴좋다. 같잖게 폼 잡으며 관심 없는 척 하더니. 그러게 평소에 찾아오는 그 녀석을 살갑게 맞아 주었어야지. 밤에 쳐들어온다고 문을 잠가버리지 말았어야지. 한바탕 일 벌이고 이불 속에서 뭉개는 녀석을 억지로 깨워 내보내지 말았어야지. 



그랬어야지 또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는 수많은 가정들이 하나로 줄을 맞춰 차근차근 들어찼다. 맨 앞에 있는 녀석이 저에게 잔소리를 한 다발 안겨주고 돌아서면 바로 뒤의 녀석이 비웃음을 한 움큼 넘겨주고 돌아섰다. 시끌시끌한 자그마한 생각조각들이 저마다 제 가정이 옳다고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 안에서 논쟁을 벌였다. 어지러운 거실 만큼 그의 심정도 온갖 잡다한 것들이 제 자리를 못 찾고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그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걸까. 녀석의 솔직함에 기대어 너무 무리한 태도를 고집했던 걸까. 하나를 잘못 하였다고 여겨버린다면 줄줄이 그와 유사한 모든 것들이 실수로 치부되어야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만큼 난잡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긴토키는 찌푸려진 낯으로 결국 무리지어 저를 떠미는 ‘그랬어야지’와 ‘그러지 말았어야지’의 등쌀에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치 그곳이 제 집인 양 끈질기게 해결사 사무실을 드나들던 꼬맹이 하나가 언질도 없이 잠적한 게 스무일 째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이라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평소와 같이 영양가 없는 말을 얼마 주고받고 늘 그랬듯이 저는 저대로 할 일을 하고, 녀석은 녀석대로 제 볼일을 보다가 눈이 맞으면 같이 몸을 섞고 했던 것 같았다. 같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기억이 의심스럽긴 하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 조차도 나름대로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사정이 없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변명 같지만, 기억에 남지도 않을 만큼 평소와 같은 패턴이었다는 뜻이다. 만약 조금 더 일찍 녀석의 부재를 알아차렸더라면 그 평소와 같았던 패턴이라도 자세히 뜯어보고 돌이켜보았을 텐데 정작 그가 허전함을 느낀 건 이미 그 날의 소소한 대화 같은 건 머릿속에서 날아갈 만큼 날아간 후의 일이었다.



처음엔 그저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은 정도였다. 그게 하루 씩 하루 씩 늘어가는 만큼 어느새 그의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계속 아니라고 도외시해왔지만. 



그렇게 긴토키가 두 번의 무료한 주말을 보내고 세 번째 주말을 보내던 찰나 고작 그 놈의 ‘권태’ 라는 단어 하나가 잔잔하던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들쑤셔 놓는 것이다. 마치 뭔가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쌓여있던 불안감은 그것을 기폭제 삼아 연달아 폭발하고 있었다.

불안은 억눌려진 마음을 깨우고 애써 잠재우던 생각들을 풀어놓았다. 들어올 때도 갑작스럽게 지 멋대로 발을 집어넣더니 설마 나갈 때도 그처럼 미련 없이 털고 나가려는 건가. 그렇게 못돼먹은 꼬마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비상식적인 관계임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던 탓에 부정적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꼬리를 무는 상념 끝에선 어느새 그들의 관계가 거의 전적으로 오키타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마는 것이다. 그럼 또 다시 밀려드는 수상쩍은 뻐근함에 그는 점점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오키타와 그가 과연 연인 관계냐고 하면 긴토키는 아마 그렇다고는 딱 잘라 말하진 못할 것이다. 외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녀석이 저보다 한참은 어린 ‘남자’아이 이기 때문일 것이고, 내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어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처음 시작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그것도 간지럽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냥 자자는 얘기로 시작한 관계. 오키타는 제가 밀어붙인 거니까 순순히 안겨주겠다는 듯이 긴토키를 유혹했다. 그 말랑말랑하고 꽤나 먹음직하던 녀석을 덥석 품고 말았던 저에게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키타는 언제나 별말 없이 그에게 찾아들곤 했으니 특별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옆자리가 비고 나서야 돌이켜 본 그들의 관계는 너무 오묘해서 딱히 세간에서 말하는 연인으로 분류하기가 애매했다.



아니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얼굴 한번 못 보면 궁금해 해도 되는 관계쯤은 아닐까.



긴토키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저 멀리서 신센구미의 간판이 작게 눈에 들어왔다. 폐도령이 내려진 시대의 무장경찰이라니, 정말 어디서 칼 맞기도 딱 좋은 직업이었다. 게다가 성정조차 유하진 않은 녀석이었으니 적이 많은 것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얌전히 당하기만 하는 녀석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기에 오키타의 부재는 차라리 녀석의 심경의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편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왔다. 죽여도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긴토키는 신센구미에 도착하자마자 혹시 그곳에 우환이 있어 보이진 않은지를 먼저 살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곳은 어느 때와 같이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기운만이 그득했다. 안심이 되면서도 어떻게 보면 근심이 되기도 하였다. 입구에서 민톤을 치는 야마자키를 손짓으로 부르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긴토키에게 달려왔다. 어쩐지 위압적인 긴토키의 기색에 야마자키는 다소곳하게 라켓을 양손으로 꽉 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긴토키는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며 앞 뒤 설명 없이 오키타를 찾았다.



‘대장님은 왜요?’ ‘그건 알거 없고. 지금 어디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야마자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가벼운 소동을 진압하러 출동했다는 이야기였다. 혹시나 어디가 아팠다거나 했던 일은 없느냐 물었더니 그 질문에도 야마자키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신고가 들어와서 일단 나가보긴 했지만 아마 별일 아닐 테니 금방 돌아온다는 대답에 긴토키는 잡고 있던 녀석을 풀어주며 가봐, 하고 웃었다.



그게 긴토키가 신센구미 담벼락에 기대어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뭉개는 사연의 전말이었다. 털을 다 골랐는지 어린 고양이는 이제는 동그란 눈으로 긴토키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까맣고 둥그스름한 게 꼭 오키타의 것과 많이 닮아있었다.



가끔이지만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한 치의 깜빡임도 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이 그를 향할라 치면 긴토키는 애써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올곧은 시선으로 왜 저를 응시하고 있는지 녀석은 결코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긴토키 역시 스스럼없이 그런 것을 물어볼 만한 무딘 신경을 가지진 않았기에 그저 답 없는 문제는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뒤늦게 진심이 되어버렸을 때 이 녀석이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자신만이 그곳에 있었다.



저를 따르고 있는 막 부화한 병아리 같은 녀석을 보며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크게 제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도 차마 모른 채.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긴토키는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갈색 빛의 털이 상상이상으로 부드러웠다. 처음 그 가느다란 머리칼을 손아귀에 쥐어봤을 때도 미끄러지는 감촉이 꽤나 좋아서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제 등판을 죄 쥐어뜯기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밝은 머리카락만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었다.



결국에는 불그죽죽한 손톱자국에 연고를 발라주던 오키타에게 혹시 머리카락 페티쉬 라도 있느냐는 질문까지 들었다. 당시의 녀석은 자못 진지한 목소리였다. 대체 그 놈의 생각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튀어나갔느냐는 타박에 오키타는 심드렁하게 긴토키의 곱슬머리를 쥐어뜯었더랬다. 



‘혹시나 나중에 머리카락 잘라달라고 할까봐 걱정했거든요.’



그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떠올라 긴토키는 추위도 잊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 때 얌전히 제 손길에 몸을 맡기던 갈색 고양이가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더니 아차 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져갔다.



세상에.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사라져버리는 것까지 똑같다니.

그 도도한 뒷모습을 긴토키는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씨?”



고양이가 사라져간 골목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긴토키의 뒤통수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귀가 바짝 긴장해서 떨렸다. 아마도 어린 고양이는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던 오키타의 발소리를 듣고서 달아난 모양이었다. 일단 멀쩡한 목소리에 긴토키는 안심을 해야 하는지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그를 향해 돌아섰다.



보름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말짱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로가 얼굴에 들어앉아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어디 크게 변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고작 스무일 만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긴토키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모퉁이 너머에서 또 다른 사람 하나가 아이의 뒤를 따라 나왔다.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이 한층 더 더러워 보일만큼 눈 밑이 퀭한 히지카타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환절기를 이기지 못해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긴토키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른한 오키타의 목소리는 피로한지 끝이 약간 갈라져 있었다. 뒤늦게 야마자키에게서 듣고서 한귀로 흘렸던 ‘병자라면 하나 있지만 대장님은 말짱해요’ 라는 말이 떠오르며 그제야 긴토키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도 아팠던 건 오키타가 아니라 저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아는 오키타 녀석은 열이 펄펄 끓던 날에도 저를 간호하라며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사무실에 난입하던, 제 일신상의 변화 같은 건 무시해버리는 괴팍한 아이였으니. 그런 아이를 얌전하게 묶어놓은 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저 남자였다.



아아, 그랬구나. 긴토키는 저의 최악의 예상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음보다는 오히려 나쁨 쪽으로 바늘은 기울고 있었다.



그런 긴토키를 알고 있는 건지 의외라는 낯을 한 오키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신센구미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입에서 나오는 날숨이 모두 하얗게 부서지는 날씨임에도 역시나 아이는 제복 외에는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있었다. 나 보러 왔어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에, 오히려 아이의 뒤쪽에서 걸어오던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오키타의 등을 넘어 저에게 직격하는 날카로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긴토키는 묻어있지도 않은 흙을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그의 위치가 올라감에 따라 빤히 응시하던 오키타의 시선도 따라 위로 올라왔다. 긴토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감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그 비어보이는 아이의 목에 꼼꼼하게 휘감았다. 히지카타의 시선이 한층 더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흉흉한 기색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 마스크에서 삐져나온 눈을 긴토키는 마주보았다. 서로 간에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시선을 마주하면서 그는 오키타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소이치로 군, 나랑 어디 좀 가지.”



“……어? 지금요?”



“응 오늘 비번이라던데.”



아이의 얼굴에 얼핏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그리고 그건 여지없이 긴토키의 신경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건 그런데요 요즘 신센구미가 말도 못하게 바빠서, 그렇게 어물거리며 말을 씹어 삼키던 오키타는 흘끔 제 뒤로 느리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일 듯 말 듯 한 염려를 담고 있어서 긴토키는 제 앞에선 작은 녀석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직모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선 이 한손에 들어오는 놈을 그대로 끌어안고 입이라도 맞춰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여전히 눈은 히지카타에게 고정시킨 채 긴토키는 애써 힘이 들어가는 손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오키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것에 초탈한 듯만 보이던 그가 충동을 다스리기 힘든 때는 백이면 백, 아이가 히지카타와 관계하였을 경우였다. 자꾸 나쁜 마음이 들려고 하는데 이를 어쩌나.



긴토키는 질 나쁘게 웃으며 오키타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긴씨가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서늘한 빛을 띄우고 있어서 오키타는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 그럼 갈까. 긴토키는 나직하게, 하지만 히지카타에게 들릴 만큼은 큰 소리로 말하며 오키타의 팔을 붙잡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자리하고 있던 장소를 벗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히지카타를 스쳐 지나가면서 오키타는 고개를 까딱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마스크 속의 그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있을지 긴토키는 홀로 상상하며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가 나타나면서부터 줄곧 이어져 오던 마뜩치 않은 기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그가 상상했던 권태로움이 원인이 아니었을지언정 고작 그까짓 이유 때문에 아이의 발길이 뜸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을 수가 없었다. 어디 좋지 않다 뿐일까. 살짝 빈정까지 상할 지경이니 대체 어디 숨어있던 소유욕이 나타나는 건지 상당히 곤란했다. 



얼마나 안달복달 못하고 그의 곁을 맴돌았을까.



얼마나 마음을 까맣게 태우며 스무 번의 밤을 지내었을까. 순위를 매기고 싶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혹여나 제가 그 남자보다도 훨씬 더 밑에 있을까 애가 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작 감기 조금 앓았을 뿐인데 그 자유롭던 아이가 덜컥 발목이 묶였으니 혹시나 그가 작정하고 오키타에게 싫은 소리라도 쏟아낸다면 이 무딘 녀석이 저에 대한 마음을 고이 접어버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떠밀리듯 제가 오키타를 찾아 나서자마자 보게 되는 그들 사이의 연약한 연결고리는 긴토키의 마음을 한 없이 가라앉혔다. 스멀거리며 다리를 타고 오르는 지저분한 감정이 아이에게 난폭하게 굴고 싶어하는 욕망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었다.



얼마나 말없이 걸었을까, 잡혀있던 손목이 서서히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간지러울 만큼 보들보들한 손바닥에서 온기가 따끈하게 전해져왔다. 정적을 가르며 사랑스런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부쉈다.



“형씨. 혹시 화났어요?”



고운 목소리가 거칠게 오르내리는 그의 충동을 잠재웠다.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긴토키는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삐졌어요?”



“긴씨를 뭐로 보는 거야.”



오키타의 손이 웃음을 참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꽤나 즐거워보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내가 없어서 외로웠다던가?”



“외롭기는 무슨. 편하기만 했지.”



“그럼 이건 정말 설마설마 싶긴 한데, 걱정했다던가?”



“…무슨.”



“경찰서라곤 질색하던 사람이 거기까지 찾아올 만큼 걱정돼서 참을 수 없었다던가?”



“내가 언제!”



왁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 신나 보이는 오키타가 팔을 흔들며 따라 오고 있었다. 꽉 맞잡은 손이 녀석이 흔드는 대로 대롱대롱 흔들렸다. 마치 오랜만의 외출에 들뜬 어린애 같았다. 해사해진 녀석의 낯빛을 보자 긴토키는 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복잡하게 재고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보였다. 아까의 피로에 절은 얼굴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저의 욕심대로 끌고 나온 것이긴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이에게도 어느 정도 필요한 휴식이었구나 생각하니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스르륵 스며들었다.



옆에 사람이 하나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 홀로 신센구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때 보다 훨씬 따뜻했다. 이대로 더 따뜻한 잠자리에 데리고 들어가면 참 좋겠거니 하고 입맛을 다시는 찰나 오키타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데 지금 어디가요? 해결사 사무실은 반대쪽인데?”



“거긴 왜? 뭐 두고 왔어?”



“데이트 하자면서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오키타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오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참기 힘들만큼 민망스러웠다. 제가 먼저 했던 소리긴 하지만 어쩐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간질거림부터가 달랐다. 요새 애들은 원래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는가, 하며 허둥대는 사이 오키타는 태평한 얼굴로 긴토키를 바라보았다. 



“데이트면 그거 아닙니까, 넣고 흔들고 싸는…,”



“스톱!!”



긴토키는 황급히 오키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대체 애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키신 겁니까, 오키타 누님!



하늘이 노란 게 어딘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아니거든? 완전 틀렸거든? 전혀 아니거든!”



태연자약하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려던 오키타는 긴토키의 만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진한 얼굴에 긴토키는 근심이 차올랐다. 명치 근처에서 ‘내가 바로 양심이다’라고 소리치는 무언가가 저를 비난하고 있었다. 워낙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았던 녀석이라 정상적인 십대 또래의 사고방식을 가지진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데이트 같은 팔자 좋은 놀음을 해볼 수 있던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웬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낯 뜨거운 소리를 해대는가 싶더니 역시나 오키타 안에서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개념이었다.



또래의 여자아이와 풋풋한 연애를 했더라면 그나마 좀 더 나아졌을 지도 모르는데 결국은 또 다시 녀석이 어울리는 게 아저씨인지라 이렇게 되어버린 것만 같아서 긴토키는 어쩐지 미안함마저 느꼈다. 그리고 녀석을 보면 항상 일단 베드인 부터 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도 조금.



긴토키는 어색하게 녀석에게서 손을 떼면서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거 말고 왜 있잖아, 밥을 먹는다거나 산책을 한다거나, 아니면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다거나.”



“관심 없어요, 그런 거.”



“안 돼! 어린이가 그렇게 어린이처럼 살지 못하면 금방 시들어 버릴 거야! 미처 꽃피우기도 전에 아저씨가 된다고!”



“너무 아저씨에 집착하지 마요, 형씨는 이미 아저씨에요.”



“내가 아니라 너 말이다 너! 요녀석아.”



“그럼 내가 여태 시든 건 형씨 때문이네요? 어린이를 어린이답지 못하게 데리고 놀았으니.”



“아니 그건…….”



오키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파렴치한.”



“야 인마!”



버럭 소리는 질렀지만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긴토키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찔끔한 마음이 있던지라 목소리는 달래듯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 없어?”



“히지카타씨한테 안 들키고 땡땡이치는 거요.”



“갖고 싶은 거라던가.”



“신센구미 부장자리.”


 

“취미활동 같은 건?”



“히지카타씨 암살하기?”



“…좀 그녀석이랑 연관 안 된 건 없냐?”



긴토키의 표정이 일순 험악스러워졌다. 말끝마다 히지카타거리는 이 악마 같은 꼬맹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어디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언제나처럼 저 얄미운 입술을 집어 삼켜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오키타가 마치 나쁜 일을 꾸미는 얼굴로 웃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긴토키를 동하게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괜히 안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라니까 싶으면서도 낮의 라디오에서 들은 말을 되뇌었다. 포인트는 신선함이라고 했던가. 신선하게 해결사 사무실 말고 야외에서 하면 되는 건가….



긴토키의 혀가 날름 튀어나와 아랫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뭐 하나 있긴 해요. 히지카타씨는 절대 못해주는 거.”



나쁜 생각하는 얼굴인거 다 보여 요 녀석아. 속으로 중얼 거리면서도 긴토키는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튀어나온 '히지카타'를 애써 인지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게 뭐냐고 묻는 수밖에 없었다.  






* *






“팝콘이랑, 콜라 두잔 주세요.”



카랑카랑한 아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사색이 된 긴토키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이마를 짚었다. 아직 보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꺼내놓은 건 영화 관람이었다. 영화 좋지. 그래 데이트 코스의 정석이긴 하지. 하며 별 생각 없이 영화관까지 따라간 긴토키는 오키타가 고른 영화를 보고 나서야 뭔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녀석이 가리킨 포스터에는 얼굴에 피 칠갑을 한 남녀 한 쌍과 ‘새벽의 저주’라는 붉은 글씨가 피가 흐르듯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봐도 돼요? 오키타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이 반짝이는 게 오로지 그를 괴롭히고자 한 것만은 아니라 실제로도 공포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지금 상황에서 기뻐해야 할런지 혼란스러웠다.



긴토키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저건 가짜다 사기다 눈속임이다 현실이 아니다’라고 백번씩 되뇌며 손에 들린 포스터를 노려보았지만, 종이위의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그림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오키타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먹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양 손에 간식을 가득 사들고 돌아온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콜라를 건네주었다.



이걸 한 번에 들이키면 배탈이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갈 수 있을까. 착잡한 마음으로 올려다 본 오키타는 싱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보이면 안 되는 것을 들킨 것처럼 금방 표정을 지워버렸다.

눈빛이나 목소리나 몸짓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아이의 기분을 알려주는 건 그 얼굴에 드리우는 가짓수가 별로 없는 표정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날카로운 눈치로 대개 오키타의 기분을 알아맞추곤 하였던 긴토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뚱한 얼굴에 여러가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보호자 없으면 안 들여보내 줘서요. 정작 그 보호자들은 이런 거 보면 밤에 혼자 못 자는 데 말이에요.”



곤도씨도, 히지카타씨도 무서운 건 질색하거든요.



녀석의 말마따나 포스터 구석에는 미성년자 관림불가 딱지가 붙어 있었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려고 그러는 거야. 긴토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에 요 녀석을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가 고민했다. 물론 미성년자라고 보기엔 오키타는 이미 지나치게 아는 게 많았지만. 



사실은 어지간한 열여덟하고 비교할 수가 없을 만한 녀석인지라 평소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키타는 그런 나이었다. 고작 19세 딱지가 붙어 있는 영화도 혼자 관람할 수 없는.



어디 공포영화 뿐일까, 술도 담배도 당당하게 사면 안 되는 거고, 야한 짓을 하는 건 고사하고 보지도 말아야 하는 나이다. 긴토키는 괜히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이렇게 상대가 어리다는 것을 자꾸만 자각해봤자 그의 양심에는 하등 도움 될 것이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몇 번이고 주억거리는 건 이제와 진지해지려는 제 마음을 돌이켜 볼까 싶은 미약한 발버둥 이었다. 물론 가책을 느끼면서도 끝내 한 걸음도 물리지 않을 그 자신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 됐어요. 들어갈까요?”



하지만 이것 봐. 19세 딱지가 붙은 영화도 보호자가 있으면 들어갈 수 있게 되잖아. 계속 같이 있어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이런 합리화는 난생 처음이라며 긴토키는 고개를 슬그머니 저으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만치 앞서간 오키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영관 앞에서 기다리는 아가씨에게 표를 두 장 건네며 긴토키는 오키타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알게 모르게 뿌듯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오키타가 피식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형씨.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이 많은 건 점점 불리해질걸요?”



“혼자는 보고 싶은 영화도 못 보는 꼬맹이가 말해봤자.”






서로 한 마디도 밀리지 않으며 입씨름을 하던 긴토키가 입을 다문 건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저건 유령 분장을 한 사람일 뿐이라며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 봐도 침대 밑에서 덜컥 나타나는 인영에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건 도무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울상을 지으며 긴토키는 오키타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지만 일말의 동요도 없이 화면만을 응시하는 아이를 보자니 답답함만 가중되었다.



대체 이런 걸 왜 돈 주고 봐야하는 거야. 심장에도 안 좋고 정신 건강에도 도움 될 게 하나 없는데. 그리고 무서운 걸 꾹 참아봤자 겁에 질린 녀석이 안절부절 못하며 안겨오는 서비스도 없고. 불쑥 치미는 생각마저 허무해서 긴토키는 이 시간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딴 생각을 하려고 눈을 감아 봐도, 시각이 차단되어 오히려 날카로워지는 청각은 비명소리와 으스스한 배경음악과 주인공의 숨소리마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잡아내었다. 손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은데 지금 뜨면 무서운 것을 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차마 눈을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까 오키타가 쥐어 주었던 캐러멜 팝콘이 손의 열기에 끈적하게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긴토키는 지금 그런 것에 주의를 돌릴 정신이 없었다. 다리가 달달 떨려오고 있었다.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하는 긴토키의 귓가에 갑자기 조금 이질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요? 나직한 녀석의 목소리였다. 실눈을 뜨고 옆을 쳐다보자 그의 눈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오키타는 입술을 휘며 웃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못할 긴토키를 알고 있는지 오키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꽉 움켜쥔 그의 주먹을 하나씩 하나씩 펼쳤다. 끈끈한 캐러멜이 녹아있었다. 긴토키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서 오키타는 천천히 그 손가락을 입에 머금었다. 축축한 혀가 달콤한 캐러멜 시럽을 훑어 올렸다. 긴토키는 그 물기어린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그쪽 엄청 단거 알아요?”



머리가 녹아버릴 만큼 다디단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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