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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후 편. if 패러랠.







“신센구미 제국 만세!!”



“만세!!”



맙소사. 이게 대체 뭐람.



히지카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열 맞춰 정렬한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의 눈에선 하나같이 알 수 없는 광기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따가울 만큼 울리는 통에 양손으로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살다보니 별 무서운 광경을 다 보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히지카타는 좀 더 무서운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광기 섞인 눈을 가진 이들의 우두머리. 홀로 고고하게 의자에 앉아서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아래를 응시하는 남자.



…저기, 저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넘긴 도도한 표정의 남자가 어쩐지 매우 익숙한 얼굴인데 말입니다.



히지카타는 당최 이 상황에 대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모르겠기에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오히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했나 싶어서 팔을 세게 꼬집어봐도 얼얼한 통증은 그곳이 현실임을 인식시켜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단상에 거만하게 다리를 꼰 남자가 말이지,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이 맞는 거냐?



“신센구미 카이저 각하께 경례!”



그런 히지카타의 의심을 깨부수기라도 하려는 듯이 갑자기 모든 대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의 이름을 외쳤다. 히지카타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또 뭐람. 대체 국장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이고 대체 대원들은 왜 하나같이 홀린 듯 저 녀석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이며 신센구미 제국은 또 뭐란 말인가. 그는 구구절절 시원한 해명까진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정황 설명이 간절해졌다.



히지카타는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단상의 남자가 서서히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붉은 색 휘장을 두른 남자는 기억속의 아이보다 한참 성숙해 보이긴 하였지만 의심할 여지없는 오키타였다. 녀석이 나이를 먹으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겠구나 하며 히지카타는 짧게 감탄했다.



아주 잠시 이 황당무계한 상황을 제쳐두고 히지카타는 찬찬히 녀석을 관찰했다. 깊어진 눈매는 녀석에게 있던 앳된 소년의 티를 지워버리고 완연한 성인처럼 보이게 하였다. 늘씬한 다리가 요사스러움을 더하고 꼬리가 길어진 입술이 모양 좋게 슬며시 웃었다.



가지런히 정돈 된 머리칼을 사르륵 흔들며 오키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렬한 대원들 앞으로 나서는 그 두어 걸음이 마치 군인처럼 절도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오키타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친애하는 신센구미 제군들, 이라며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 번도 오키타가 지도자가 된 모습을 상상해 본적 없었지만, 실제로 목도한 녀석은 자연스럽고 위풍당당한 지배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그 얼토당토않은 연설은 한귀로 흘려 넘기며 그저 두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모습에 집중했다. 오키타의 태도는 마치 제국의 황제라도 되는 양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한결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를 달큰하게 맴도는 것이 어리던 때와는 또 다른 색다른 맛이 있었다. 홀린 듯이 오키타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히지카타는 문득 녀석의 휘장 아래 숨겨진 왼팔이 궁금해졌다.



이곳이 정말 들은 대로 2년이 지난 후의 세계라면 아마 엊그제 생겼던 왼팔의 상처도 다 나아 있어야 했다. 그의 기억에는 고작 이틀 전의 얘기였지만 그들에게는 2년과 이틀 전의 사건일 그 당시에 오키타는 홀로 야간순찰을 돌다가 술 취한 행인들과 시비가 붙었더랬다.



멀리 있는 법보다 가까운 주먹을 사용하는 편을 선호하는 오키타는 늘 그래왔듯이 제 말에 따르면 ‘법 보다 고작 일이초 빠를 뿐 본질은 별다를 바 없는’ 주먹을 사용해 그들을 정리했다. 칼집에서 칼을 뽑지도 않았던 건 나름대로 상대가 민간인이라 녀석이 베풀어준 마지막 온정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비겁하게도 죽은 척 엎드려 있다가 등을 보이자마자 깨진 병조각을 들고 달려들었고, 구둣발로 그 팔목을 날려버리긴 했지만 타이밍이 조금 늦어 오키타는 왼팔에 길게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다. 가장 기본적인 배려를 해준 저와 달리 치사하게 무기를 들고 덤볐다고 이를 갈던 녀석을 제치고 상처를 봐주던 히지카타는 얕고 길게 찢어진 자상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히지카타는 아직 아무것도 믿기지가 않았다. 세상에 하루아침에 어떻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2년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국장을 그만둔 곤도라니! 부장자리를 꿰어 찬 야마자키라니!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단연 신센구미 제국과 그 정점에 선 오키타였지만 말이다.



히지카타는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단체 몰래 카메라 라던가. 그렇기엔 지나친 인력낭비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히지카타는 여전히 앞뒤 없이 떠들고 있는 오키타를 가만히 응시했다. 말을 할 때마다 슬쩍슬쩍 내비치는 붉은 혀가 어이없게도 그의 눈엔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사부작대는 붉은 망토도 누가 입혀놨는지 매우 거슬렸다. 되게 맘에 안 드네. 중얼거리며 히지카타는 기어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빠르게 단상 쪽으로 다가갔다. 뭐든 간에 저 정신 사나운 천 쪼가리를 녀석에게서 벗겨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그 김에 왼팔도 함께 들춰보면 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려 하는 의심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것이었다. 



“정숙하게 제군. 제군들의 활약으로 현재 제국은 착실히 세력을 확대하여 지금은 에도의 절반을 세력하게 다스리게 되었다.”



오키타는 진정으로 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처럼 위엄 넘치게 외쳤다. 유려한 목소리가 히지카타를 압도했다. 대원들 사이에서도 어린 축에 속하는 녀석에게 1번대 대장을 맡긴 건 온전히 녀석의 실력 때문이었다. 반발이나 우려의 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자그만 녀석일지라도 제법 사람들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했기에 히지카타 역시 곤도의 결정에 동의하였더랬다. 그리고 별 무리 없이 신센구미의 결성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키타가 이끄는 1번대는 돌격부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대의 얘기였고, 이만큼 큰 집단을 이끄는 역할까진 맡길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위압감 넘치는 모습을 보니 히지카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오판이었나 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카리스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생 신센구미 제국이 쇼군을 무너뜨리고, 에도 성에 우리 제국 깃발을 꼽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히지카타는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빠르게 옮겼다. 



“오판은 개뿔, 카리스마는 무슨! 신센구미로 대체 뭘 하려는거냐, 요녀석아!”



소리를 버럭 지르며 오키타의 코앞까지 달려온 히지카타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붉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와 제 옷깃을 움켜쥔 히지카타를 응시했다. 말끄러미 저에게 와서 박히는 시선은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굉장히 달랐다.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막연하게 따라붙는 이질감. 아주 잠시 눈이 마주쳤을 뿐이지만 히지카타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녀석은 왜 나이를 먹더니 쓸데없는 요사스러움만 늘어선 사람을 괜히 이상한 기분을 들게 만든담.



한숨을 푹 내쉬며 히지카타는 항복을 선언하듯 양손을 가볍게 떼었다. 그제야 시선이 떨어진 오키타는 어깨를 툭툭 털어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얜 누구니 지미?”



“어이.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이렇게 짖어대는 걸 보니 넌 목숨이 아깝지 않나보지? 어디보자… 삼일동안 소금물만 받아 마시면서 천장에 매달려 있게 해줄까, 아니면 일주일동안 팬티만 입고 가부키쵸를 순찰하게 해줄까? 더 좋은 걸로 골라 봐.”



“…S자식이 정점에 서면 신센구미가 이렇게 되는구만.”



히지카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오키타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어른거리는 붉은 망토부터 어떻게 처리해야겠다 싶어 손을 가져다 대자 오키타는 정색을 하며 짝 소리 나게 손을 쳐내었다. 나른하던 눈이 사납게 변해서 히지카타를 쏘아보았다. 손등이 얼얼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감히 지금 어디에 손을 올리는 거냐.”



냉랭한 시선이 고압적으로 히지카타를 주시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묘한 얼굴을 한 녀석에게 히지카타는 손등을 털어내 보였다.



옷자락 좀 만졌기로서니 이렇게나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해냈다. 붉게 드리운 휘장에 뭔가 알 수 없는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는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힌 그는 경계하지 않을 만큼 느린 걸음으로 오키타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꼼짝도 않고 그저 빤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히지카타가 별안간 오키타의 왼쪽 팔뚝을 붙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발을 뒤로 뺀 오키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어찌나 매섭게 때려 박았는지 헉하고 숨을 들이키며 히지카타가 두 걸음 물러서자 오키타는 뒤에 대기 중이던 대원들에게 손짓을 까딱하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다가와 히지카타의 양 팔을 붙들었다. 여러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한 듯 움직임은 하나같이 일사불란 했다. 가까이 다가온 오키타는 구둣발로 그의 복부를 툭툭 건드렸다.



“크으…! 오키타 너 이 자식!”



힘이 실리지 않은 약한 움직임이었지만, 한 번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미처 참지 못한 신음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떨구어진 고개 위로 오만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넌 어디서 나타난 불순분자지? 아직도 겁 없이 제국에 도전하는 변절자가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는데?”



“헛소리 집어치워! 제국은 무슨!”



“지미, 이 녀석을 가둬라.”



깔끔하게 손을 털고 돌아서 버리는 오키타 뒤에서 히지카타는 버둥거리며 그에게 달라붙은 녀석들을 떨쳐내려고 했다. 검을 쥐었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이 녀석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그는 녀석들을 적으로 인식할 마음이 없었다.

아직까지 뭐가 뭔지 파악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는 건 일단 피하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 돌이킬 수 없는 짓 중에서도 죽음이란 녀석은 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혼란스러움을 핑계로 죄 없는 녀석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오래 후회할 것임을 혼탁한 머리는 본능적으로 도출해 내고 있었다. 대원들에게 상해를 입힐 의지가 없는 히지카타는 결과적으로 손쉽게 제압당했고 지하에 있는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남들은 자주 가둬봤어도 내가 갇힌 건 또 처음이네.’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히지카타는 차가운 돌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오싹할 만큼 서늘한 느낌이 복부의 통증에서부터 신경을 차츰 분산시켜주었다. 아마 들춰보면 시퍼런 멍이 올라왔을 배 위를 손으로 감싸며 히지카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아무렴 저에게 손 하나 까딱 못할 그를 알면서…. 공격은커녕 손에 쥐기조차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오키타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제대로 꽂히면 그 가벼운 주먹도 얼마나 매서운지 히지카타는 새삼 깨달았다. 명치끝이 자르르 울렸다. 단단한 돌 위에 앉아있던 엉덩이가 배길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고통이 엷어졌다.



히지카타는 천천히 일어서서 넓지 않은 독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희미한 복도의 전조등만이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들어와 안을 밝혔고 두터운 외벽은 바깥과의 완전한 단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텅 비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복도라도 내다보기 위해 다가간 철문은 어디서 얻어맞기라도 한 마냥 바깥쪽으로 휘어있었다.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세게 내리친 흔적이었다. 움푹 파인 자리를 손으로 느리게 훑어본 히지카타는 이내 떠오른 짧은 단상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거 열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노기서린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지하 감옥을 울리던 때는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명했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철문에 움푹 파인 자국을 만들어 놓은 녀석은, 히지카타를 여기에 가둔 장본인이었다. 전세역전이군. 히지카타는 추억에 잠겨 엷게 중얼거렸다.



그 때는 히지카타의 기억으론 아마 오키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방에 갇히던 날이었다. 길길이 날뛰던 아이를 이곳에 쳐 넣고 문을 걸어 잠근 사람 역시 다름 아닌 본인 이었으므로 쉬이 잊혀 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녀석의 죄목은 명령불복종. 지금에 와선 생각도 나지 않는 막부의 어떤 멍청이 때문에 그는 처음으로 오키타에게 공적으로 벌을 내렸더랬다.



녀석이 받은 임무는 막부의 고위 간부에 대한 호위였다. 뒤늦게 밝혀진 본질은 그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처음에 하달된 명령은 분명 ‘호위’였었다. 그렇기에 히지카타는 늘 하던 대로 오키타에게 1번대 대원 두 명을 붙여서 그곳에 보냈다. 아직도 대체 누가 입을 다물었기에 일이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작 그들이 관료의 거처에서 직면한 상황은 막연한 위험으로부터의 보호가 아닌 이미 예고된 조직으로부터의 암살이었다.



심상치 않은 크기의 조직의 암살부대 전원이 동원되었던 그날 밤의 테러는 고작 대원 셋이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엄살 피우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오키타의 입에서 자존심 상한 듯이 띄엄띄엄 나온 정황 보고는 보지 않았음에도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짐작케 하였다. 오키타는 평소의 그 뻔뻔하기까지 하던 평정심을 잃고 조직의 암살예고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은 막부 관료를 거세게 몰아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끝내는 놈과 테러조직 사이의 알량한 비리를 탈탈 털어낸 오키타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돌아서버렸다.



우왕좌왕 하며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만도 버거워하던 대원 둘을 살뜰하게 챙기고선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오키타는 귀환했다.



‘녀석이 처음부터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신변보호를 청하였다면 어찌됐든 그 놈을 지켰을 겁니다. 하지만 제 것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천치분간 못하던 아둔한 자식에게는 누구의 목숨도 지불할 수 없었어요.’



오키타는 곤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당하게 말했다. 문간에서 녀석을 지켜보던 히지카타는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오키타는 곤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니 그가 이런 일로 저를 책망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정직한 얼굴로 담담한 표정으로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거겠지.



상황을 파악하면 할수록 속이 뒤틀렸다. 히지카타는 그 길로 오키타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독방에 처넣었다. 놀라서 만류하려는 곤도를 단칼에 잘라내고, 명령불복종이란 죄목을 붙여 아이에게 삼 일간 그 안에서 반성하라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섰다.



당연한 순서로 오키타는 미친 듯이 날뛰었고 지금까지도 전혀 녹슬지 않은 흔적을 그곳에 남겨두었다. 파리해진 얼굴로 독방에서 나오던 오키타를 그는 아직 기억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마냥 히스테리만 부렸던 탓에 나오자마자 휘청거리며 그의 품으로 넘어지던 오키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흉한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았다.



네가 뭔데 나를 가두었냐는 포악한 시선이었다.



히지카타가 곤도의 선처에도 불구하고 오키타를 억류하였던 것은 녀석이 더러워서라도 세상에 굴복하는 법을 배웠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곤도의 품 아래인 신센구미는 녀석이 활개 쳐도 좋은, 안전하고 넉넉한 세상이었다. 니들 수습하느라 힘들어 죽겠다는 앓는 소리가 입버릇이던 곤도지만, 그는 한 번도 오키타에게 옳지 않은 걸 옳다고 하라고 얘기한 적 없었다.



연옥관을 부숴버린 일로 협박과도 같은 충고를 상부에서 들은 뒤에도 그는 정작 주범인 오키타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히지카타에게만 애들 단속 잘하라고 넌지시 일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단속이라는 말의 속내 역시 무모한 짓을 하려는 아이를 말리라기 보단 녀석이 혹시라도 불합리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챙기라는 걱정에 가까웠다.



그는 더러운 꼴은 스스로만 참으면 된다는 우직하고 품이 넘치는 남자였다. 그러한 남자의 품안에 안온하게 안긴 오키타를 자각하는 순간, 히지카타는 더럭 겁이 났다. 녀석은 겉보기엔 단순한 성격파탄자 같을지라도 정작 그 안에 든 건 올곧고 바르게 자라고 있는 곤도의 아이였다.



히지카타는 스스로가 곤도보다 잔걱정이 많고 착해빠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던 탓에 오히려 좀 더 객관적으로 앞날을 내다보게 되었던 것이다. 오키타는 결코 곤도의 품 아래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을 테고 곤도 역시 그리 여기겠지만 히지카타는 보다 회의적이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올바름은 위태로웠다. 그건 신센구미를 나서자마자 도처에 도사린 독사 같은 자들에게 덥석 물릴 만치 연약한 것이었다. 질척거리고 더러운 진창 같은 세상에서 단박에 발목을 잡혀 목덜미를 물어뜯길 종류의 덧없음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위태롭고 불안전하면서도 더 없이 사랑스러운 것은 마치 그가 좋아하는 시구처럼 고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키타는 더러움을 알아야 했다. 언젠가 곤도의 비호가 없어진 세상에 맨몸으로 나가 비참하게 꺾여버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악역을 맡아서라도 녀석에게 숙이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없는 행동으로 오키타에게 오해를 받는 것보다도 그 어리석은 아이가 괜한 해를 입는 것을 보는 게 몇 배는 더 힘들 것이었다.



그래서 히지카타는 악의적인 더러움을 피할 수 있는 융통성을 녀석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세상엔 불합리한 일이 많다는 것을 각인시켜서 아니꼽고 더럽더라도 오키타가 제 신념을 유연하게 숙여주었으면 했다.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운 올바름이 없더라도 녀석은 그에게 충분히 눈이 부셨고, 그 어떠한 올곧음도 아이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었다.



정도(正道)를 걷는 것보다는 옆길로 새는 게 너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널 길 밖으로 끌어 낼 거라고 히지카타는 홀로 다짐했었다. 하염없이 울분에 타오르던 아이의 발길이 닿은 철문에 히지카타는 이마를 가져다 댔다. 녹슨 쇠의 냄새가 비릿했다.



“거기 히지카타씨죠?”



상념의 늪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던 그를 끌고 나온 건 뜻밖에도 문 밖에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음성만으로는 쉽사리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녀석이었다. 누구냐고 물을 새도 없이 몇 번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꺼운 철문이 스르르 열렸다.



뭐가 이리 허술해. 헛웃음을 지으며 열린 문 밖에 있는 사람을 바라본 히지카타는 문이 열리는 것을 볼 때보다 조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상대방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안경 군? 네가 왜 여기 있지?”



“아직 얘기 못 들으셨군요. 지금 오키타씨가 가부키쵸를 함락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해요. 가장 걸림돌인 해결사부터 밀어버린다는데 저를 인질이랍시고 잡아넣더라고요. 줄곧 옆방에 있다가 겨우 나왔습니다.”



“맙소사, 오키타 이 자식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히지카타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담배를 한대 빼물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연기는 그대로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폐를 한 바퀴 점령하고 나온 씁쓸한 맛의 연기가 입 밖으로 나가는 찰나 신파치가 조심스럽게 그를 벽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껏 낮춘 목소리가 마치 음모라도 꾸미는 것처럼 불안하게 속삭였다.



“히지카타씨. 삼십분 후면 순찰을 도는 대원이 지나갈 겁니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그래. 탈주가 알려지면 움직이기 힘들어지겠지. 어쩔 생각인거냐.”



“일단 저는 해결사 사무실에 이 일을 알리러 갈게요, 히지카타씨가 카이저를 좀 설득해 주세요.”



원래부터가 제 말은 절대 안 듣던 녀석인데 2년이나 갈고 닦았으니 그게 오죽할까. 히지카타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결론 밖에 낼 수 없었지만 이미 충분히 불안한 듯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 신파치에게 괜히 짐을 더 얹어주고 싶진 않아 생각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가는 길은 이쪽이라고 통로 사이의 샛길을 가리켰다. 아무도 없는 어둠이 내려앉은 미로를 함께 빠져나가면서 히지카타는 종전부터 궁금하던 점에 대하여 물었다.



“그나저나 너 문은 어떻게 연거지? 오키타 녀석도 맨손으로는 못 열었던 건데.”



“아, 그거요? 이거에요 이거.”



신파치가 빙그레 웃으며 꺼내 보인 건 가느다란 철사조각이었다. 옷핀을 길게 뽑은 것 마냥 구불구불한 녀석은 척 보기에도 열쇠로 보기엔 너무 조악했다. 히지카타가 그것을 받아들고 요리조리 살피는 동안 신파치는 등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새 옷이라서 다행이었어요. 모양 잡아놓는 옷핀이 안 뽑혀 있더라고요. 처음 따보는 문이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두 번째는 좀 더 쉽거든요. 히지카타씨 있던 곳도 같은 모양인 건 운이 좋았죠.”



“…별 재주가 다 있군.”



“그런가요? 하하. 사실 저희 집 화장실 문이 워낙에 말썽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손에 익었나 봐요. 누나는 이런 거 전혀 할 줄 모르니까.”



“이봐. 이거 나 좀 가져가도 되겠지?”



히지카타는 옷핀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씩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며 신파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대체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묻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갈림길에서 넌 이쪽이라고 가르쳐 주더니 금세 사라지는 히지카타를 말끄러미 보며 신파치는 화장실과 옷핀에 대한 연관성을 잠시 생각해보다 이내 더 급한 볼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역시나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 *







“지금 일단 감찰조가 가부키쵸 곳곳으로 잠입하는 중입니다. 자리를 잡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



“인원은 얼마나 나갔지?”



“열일곱 입니다.”



열일곱이라. 미묘하네. 생각에 잠겨있던 오키타는 희미하게 아려오는 왼 팔을 붙들었다. 저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그는 걸음을 늦춰 옆에서 보고를 이어나가는 부관에게서 한 뼘 더 멀어졌다. 팔뚝에서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도 아까 그를 상대하다가 상처가 또 다시 터진 모양이었다. 지긋지긋하리만치 아물지 않는 가늘고 긴 자상은 2년 내도록 시뻘건 피를 토해내고서도 도통 멎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오키타는 대원들이 집합해 있을 광장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뒤돌아보는 부관에게 먼저 가서 정렬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만 내린 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깟 거슬리는 통증 따위 무시해버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상처는 오키타에게 있어 아킬레스건이었다. 백방으로 여러 의사들을 만나보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그냥 평범한 상흔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다. 꿰매도 보고 어울리지 않게 석고붕대까지도 감아봤지만 상처는 잠시 붙는가 싶더니 작은 충격에도 금방이고 벌어져 붉은 피를 쏟아냈다. 오키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자꾸만 벌어지는 상처는 이제 아픈 것을 떠나서 지나치게 신경을 갉아먹는 존재였다. 테이핑이라도 하지 않으면 남은 시간 내내 거슬릴 것을 알기에 오키타는 기어이 가던 길을 멈추기까지 하고서 상처를 치료하러 온 것이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부자리 맡의 서랍장을 열자 압박붕대가 빼곡히 쌓여있었다. 그간 얼마나 반복했던 일인지 자연스럽게 하나를 집어든 오키타는 대강 이빨로 포장을 뜯고 한쪽 끝을 입에 물더니 남은 손으로 제복 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우악스럽던 남자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인지 상태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살짝 굳어진 피와 새로 흐르는 선혈들이 뒤엉켜 지저분해진 제복을 보고 거칠게 한숨을 내쉰 오키타는 막막한 얼굴로 상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대충 해버릴까 붕대를 든 손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하다가도 결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뒷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고는 오키타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벗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것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며 그는 차근차근 벗어낸 겉옷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붉은 휘장 위로 재킷과 조끼, 마지막으로 셔츠까지 던져낸 오키타는 집무실에 딸린 화장실 손잡이를 돌렸다.



삐그덕, 별 무리 없이 열리는 문 틈 사이로 오키타가 한걸음 내딛는 순간 누군가의 거센 악력이 왼팔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갑작스럽게 당겨진 팔에 균형을 잃은 발이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넘어진다! 눈을 질끈 감고 충격에 대비하여 이를 악물었는데 얼얼해야 할 뒤통수와 엉덩이 대신 오히려 예상치도 못한 왼팔에서 찌르는 듯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윽!’ 정제되지 않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손에 잡힌 채 매달린 왼팔은 온 몸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자상이 있는 쪽이었다. 오키타의 신음에 놀랐는지 상대방은 허둥거리며 그의 허리에 나머지 팔을 감고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 팔이 왜이래.”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키타는 탄식을 내뱉으며 숨기듯이 상처를 가렸다.



“네 놈이 잡아당겨서 그런 거잖아.”



불만에 찬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조금 더 시야 가까이로 왼팔을 들어 올린 남자는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혀를 찼다. 체중이 실렸던 탓에 가늘던 상처가 양 쪽으로 쫙 벌어져 이제는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오키타는 남자의 가슴팍에 안긴 꼴이 썩 맘에 들지 않는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일단 지혈부터 하자.”



“아니지, 일단 이거부터 놓으라고!”



벗어나려고 무던히 애쓰는 몸부림을 무시한 채 히지카타는 한 손엔 다친 왼팔 대신 말짱한 오른팔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넘어지지 않게 오키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세면대 쪽으로 끌고 갔다. 수건에 물을 살짝 적시고 상처 주변을 조심스레 닦아내자 오키타는 소리 없이 눈가만 가만 찡그렸다. 한데 엉켜 상처를 가리던 피를 거둬내자 히지카타 눈에 들어온 건 마치 엊그제 생긴 듯 뚜렷한 상처였다. 혹시나 싶던 심증이 물증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



“치워라 불순분자.”



“너야말로 시답지 않은 연극 그만해 소고.”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오키타의 상처를 수건으로 꽉 누르며 지혈시키던 히지카타는 고개를 돌려 녀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기억하고 있다는 거 다 알아.”



“……눈치 빠르네요, 히지카타씨.”



체념했다는 듯 히지카타를 바르게 응시하는 눈빛은 오키타의 것이 맞았지만 여전히 뭔가 알 수 없는 낯선 색을 띄우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무표정하게 마주봐오자 히지카타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게 느껴져서 고개를 빠르게 휘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다시 쉽사리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그는 화장실 문만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장난은 그만치고 이제 그만 설명 좀 해봐.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



“설명하고 말게 어디 있습니까. 보이는 그대로지.”



“웃기지 말고! 너 이거 그저께 난 상처잖아!”



“……히지카타씨한테는 고작 이틀 전 입니까? 나는 2년하고 이틀이 지났는데.”



“뭐…,”



“장난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설명할게 없어요. 히지카타씨는 이년간 행방불명이었고 곤도씨는 결혼해서 국장자리를 내려놓았고 내가 신센구미를 이끌게 되었다. 이게 진실입니다.”



“행방불명이라니…. 내가 그럼 정말로 혼자서 2년을 뛰어넘기라도 했다는 거야?”



“기억 못한다고 서운해 마요. 2년이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혀질만도 한 시간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오키타는 실소했다. 몹시 낮고 씁쓸한 웃음이었다. 히지카타는 오키타와 그제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네 팔뚝에 이렇게 증거가 있잖아! 설마 우연히 같은 자리에 같은 상처가 생겼다는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려는 거냐!”



“글쎄요, 뭐로 베였던 건지 당최 낫질 않던데요.”



여상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히지카타는 기가 막혔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혹시나 나 혼자만 잘못된 것일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디밀었지만 그러기엔 손에 든 증거가 너무 명확했다.



“이봐 소고. 잘 생각해보라고. 이렇게 깨끗하게 막 생긴 것 같은 베인 자국이 2년간 지속될 리가 있나. 여긴 가짜야. 뭔가가 잘못된 곳이라고.”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이야기 했지만 오키타는 여전히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히지카타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에 올라온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오키타는 상처부위를 지혈해주던 손을 뿌리치고 히지카타를 기어코 넘어뜨렸다. 그리고 쾅 소리 나게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히지카타가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는 걸 막아 세우더니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점점 다가오는 오키타의 얼굴에 히지카타가 저항을 멈추자 어깨를 누르던 손이 움직여 이마를 꾹 눌렀다. 오키타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뺨을 쓰다듬는 녀석의 손길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걸 느낀 순간 히지카타는 문득 오키타가 윗옷을 벗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그 차디찬 손은 얼굴을 지나쳐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히지카타 쪽으로 상체를 숙인 오키타가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히지카타씨…, 그럼 내가 가짜라고 생각합니까?”



“…어?”



“내가 가짜면… 날 베어 없애기라도 할 겁니까?”



가까이 다가온 오키타에게서 확 느껴지는 녀석의 체향은 이 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은 어떻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의 어린 아이는 이런 노골적인 표정을 지었던 걸까.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숨결이 지나치게 간지러워서 히지카타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쪼그리고 앉은 채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키득거리는 오키타는 나른하면서도 요사스런 미소를 지었다. 목을 움켜쥐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히지카타의 가슴팍을 더듬다가 단정하게 매여진 스카프를 풀어 내렸다. 하얀 손가락에 감기듯이 매달린 스카프를 기어이 빼낸 오키타는 다시금 히지카타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미끈한 살덩이가 입술 위에 내려앉은 순간, 히지카타는 사고가 멈춰버리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가동 중이던 기계가 순간적으로 멎어버리는 것처럼 머리가 하얘지는 사이 넋 놓고 벌어진 입술사이로 뜨거운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농염하게 그 안을 휘젓는 혀는 입천장과 여린 살결들을 적시며 그의 망설임을 송두리 채 뽑아버릴 것처럼 움직였다.



격렬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살짝 뒤로 물러서는 입술은 몇 번이고 줄듯 말듯 애를 태웠다. 히지카타가 저도 모르게 이끌려 그의 안으로 침범하려는 그 찰나에 오키타는 약 올리듯 입을 떼었다. 단추가 어느새 두어개 풀린 가슴팍 안에는 하얗고 선이 고운 녀석의 손이 들어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오키타는 야릇하게 웃었다. 마치 속된 거리의 여자처럼 녀석은 입술을 부드럽게 휘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키스 어디서 배웠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마냥 어린 동생 같았던 녀석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일에 몹시 익숙해 보인다는 건,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너 이 자식!”



“아, 이제 히지카타씨 자식 아닙니다. 당신을 골머리 썩게 만들던 부하직원은 더 이상 없어요. 히지카타씨가 그렇게 거추장스러워 하던 것들, 전부 버렸습니다.”



셔츠 안을 스멀거리는 손을 히지카타는 저지시켰다. 남을 유혹하는 몸짓에 이렇게 거리낌 없는 녀석의 모습에 뱃속에서 불안증이 들끓었다. 초조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이상한 자세로 엉켜 뒹구는 게 오키타에게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히지카타는 벌떡 몸을 일으켜 오키타의 양 팔을 붙잡았다.



“어디서 배웠어, 이런 짓.”



히지카타는 낮고 진득하게 화를 냈다. 위협적으로 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키타는 아랑곳 않고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왜요? 당신이 직접 가르쳤잖아요. 신념을 버리는 거. 더러운 일에도 입을 다물고 불합리한 일에도 눈을 감는 거. 하잘것없는 고집은 버리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라고. 응? 그렇게 말했잖아요, 히지카타씨.”



“소고 너…!”



히지카타는 뒤통수를 망치로 크게 맞은 것처럼 망연한 얼굴로 오키타를 내려다보았다. 말간 얼굴에 색기 넘치는 눈을 한 녀석은 조르듯이 저에게 동의를 구했다.



빌어먹을.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욕설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오키타는 팔을 뻗어 히지카타의 목을 휘감았다. 바짝 달라붙어서 차근차근 속삭이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괜한 오해 집어 치워요. 전부 제국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곤도씨가 떠난 후, 신센구미가 얼마나 바람 앞의 등불 같았는지 당신이 알리가 없지. …마치 맨 바닥에 내쳐진 어린이들 마냥 우리가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압니까?”



“…….”



“나는 선택을 한 거예요. 곤도씨가 남겨둔 이곳을 위해. 당신에게 배운 대로.”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히지카타는 파리하게 질려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오키타에게 가르쳤던 건 분명 그것이 맞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휘어지라고 종용했지만 사실은 휘어질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믿었다.



오키타에게 세상에 굴복하는 법을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도 분명 진심이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에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리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에게 닥치는 광풍을 모조리 막아줄 것이라고.



자신 역시 결국은 곤도와 전혀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녀석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겠다 생각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파심이었을 뿐이었다. 드러낸 적 없이 몰래 품고 있었던 건 그런 진창에 빠질 일이 없게 널 지킬 거라는 허망한 다짐. 그렇게 안일한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나 믿지 못한 허울뿐인 마음이었음을 이제와 깨닫는다고 해도 너무 늦은 이야기였다.



“그 이년 내내 어디에 틀어박혀서 줄곧 나타나지도 않은 주제에 착실하게 히지카타씨의 말을 따르고 있던 나에게 지금 이 현실이 가짜라고 말하는 건가요?”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마치 달콤한 독처럼 히지카타를 옥죄었다. 멎어버린 듯이 굳어있던 히지카타는 서서히 팔을 들어 제 목에 매달린 아이를 마주 안았다.



“그래서… 나를 없앨 생각이에요?”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화장실 안을 울렸다. 괴로운 듯 오키타를 빈틈없이 끌어안은 히지카타의 어깨가 떨려왔다. 맨살에 닿는 감각이 서늘하고 선뜩했다. 소리죽여서 웃고 있던 오키타는 그대로 히지카타에게 다시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히지카타씨! 어디계세요! 여긴 현실이 아니에요!



저 멀리서 신파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치 분리된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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