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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란편 if 패러랠. 사망소재 있습니다.




‘교과서적인 이상만으론 조직을 움직일 수…!’



곤도에게 그 염려 섞인 질타를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순간, 히지카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섬뜩한 두려움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로 스며들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저 자신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넌더리가 났다. 이토로부터 신센구미를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지켜야 하는 그 순간에서조차 몸은 멋대로 의지를 배반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통제 불능의 감각은 오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 *







히지카타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탁자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요검에게 홀린 이후로 부쩍 늘은 습관이었다. 꽤나 오래도록 고민을 했지만, 답을 내릴 것도 없었다. 그에겐 수치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답을 내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답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 뿐. 당장 누구에게라도 자신에 대해 설명해 놓는 게 옳은 상황이었다.



손가락이 좀 더 빠르게 탁자 위를 두들겼다.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다. 또 다시 미친 듯이 탁자 위를 두드리는 손길이 얼마나 거셌는지 손톱 끝이 볼품없이 뭉그러져 있었다.



“히지카타씨 미쳤습니까? 아니면 정서불안?”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자 얌통머리 없는 그의 부하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코앞에 들이밀어진 녀석의 얼굴위로 옅은 색 머리칼이 사르르 내려앉는 게 마치 밝은 색 휘장을 드리우는 것 같았다. 탁자만 연신 두드리던 손이 멎었다. 지척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키타는 히지카타가 진정된 낯빛을 하자 이내 저도 맞은편 자리에 앉아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오키타는 ‘나는 지갑 없이 나왔다’며 주머니를 까뒤집어 보였다. 히지카타는 주스 잔을 들고 나온 종업원에게 자연스럽게 값을 지불했다.



“근무 중인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해요?”



빈 빨대를 타고 주홍빛 액체가 올라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며 히지카타는 숨을 골랐다. 그의 머릿속엔 채근 하는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오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겠다는 초조함뿐이었다. 재수 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통제하는 건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다소 가혹해 보이는 국중법도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동료를 베었다. 자기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물러 터진 녀석은 받아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신센구미는 그런 만만한 둥지가 아니었다. 히지카타는 악역을 맡아서라도 그곳을 그렇게 철의 집단으로 만들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에 미련을 느낀 적도 없었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 역시 없었다. 황량한 길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자신의 두 다리 뿐이라고 여겼다. 두 팔을 뻗어 검을 쥐고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그 궤적 위엔 나약함을 위해 남겨둘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게 이렇게나 거추장스러운 것임을 그는 미처 몰랐다.



물론 지금의 경우는 요검에 잠식된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제 손으로 여럿의 목을 쳐버린 국중법도를 이미 손에 꼽기도 어려울 만큼 어겼다는 건 변명을 붙여가며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사태가 여기까지 다다르자 히지카타는 저주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고, 검은 그냥 검이기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한 번만 더 그 대장장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렇게까지 맥없이 요검에게 당하진 않았을 것을.



잠깐씩 끊겼다가 돌아오는 기억들에 히지카타는 절로 몸서리가 처졌다. 다음엔 또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닐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새로운 인격이 불쑥불쑥 치미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연쇄적으로 뒤따르는 오싹함은 히지카타를 점점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좌우가 어긋난 모형을 보는 것처럼, 혹은 대칭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양 기우뚱거리며 휘둘리는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버티고 버티다 드디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때에 결국 털어놓을 곳은 녀석 밖에 없었다. 앞만 보고서 걷던 그 길 위에는 무서운 기세로 저를 향해 돌진하던 아이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지지리 말도 안 듣는 부하에게 도움을 요청할만한 거리가 아니라는 건 히지카타 역시 알고 있었다. 도와줄 방도가 있지도 설령 있다 해도 도와줄 성품인 것도 아니었으니.



그러니까 이건 도움을 요청하는 게 아니고 단지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러주는 것뿐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기며 히지카타는 무겁던 입을 열었다. 빨대를 물고 있던 오키타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오키타는 들고 있던 잔을 탁자위로 내려놓았다. 반쯤 남아 있는 액체가 찰랑임을 멈추기도 전에 히지카타의 설명은 끝이 났다. 



“그렇게 된 거다. 이 검을 손에 넣은 뒤로 모든 게 얼크러지기 시작했어. 아무래도 진짜로 요검에 저주받은 모양이야.”



와하하하. 오키타는 얘기를 듣자마자 놀라지도 않고 와락 웃었다. 다소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녀석의 웃는 낯짝을 보니까 떠안고 있던 짐의 무게가 실은 별거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문장으로 나열해 보니 일견 우스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 내말 안 믿지? 하긴 내 말을 믿을 인간이 아니지.”



담배의 불을 붙이며 그는 말했다. 남의 일처럼 관심 없는 얼굴로 응시하는 오키타가 야속 할만 한데 신기하게도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거리에 널려있는 돌멩이에게 넋두리를 늘어놓듯 누군가에게 이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던 게 제 속내겠거니 하고 히지카타는 생각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한 짐 가벼워졌다. 그래서 조금 더 가벼운 목소리로 그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다른 인격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모자란 구석이 요검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하는 거야.”



“히지카타씨 맹한 걸 검 탓으로 돌리면 안 되지. 히지카타씨는 원래 맹돌이였잖아요.”



“맞아요, 난 원래 이런 놈 이었어요.”



“어랍쇼. 이거 정말 적응이 안 되는 걸.”



오키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웃었다. 그리고 그 실소가 끝나기 무섭게 소파 등받이에 여유롭게 걸치고 있던 오른 팔을 내리며 아이는 상체를 조금 숙였다. 탁자에 기댄 팔에 느리게 턱을 괴는 것과 함께 오키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주 천천히 그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가시면서 일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귀여운 구석이 남아 있던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쏙 빼자 무장경찰 1번대 대장의 얼굴만이 그곳에 있었다. 제법 진지한 낯을 한 오키타는 입꼬리만 살짝 빼서 웃었다.



부슈에서부터 줄곧 곤도의 뒤만 쫓아다니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걸까. 마냥 꼬마로 머물러 있을 것 같던 녀석이 이따금씩 남자다운 표정을 짓는 게 히지카타에겐 참으로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뭐예요? 곤도씨와 다툰 것도 요검 탓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어색한 딱 그만큼 저 깊은 어딘가에서 밀려드는 건 상실감이었다. 녀석이 이렇듯 진지한 낯으로 임해주는 일은 언제나 히지카타 그 자신이 것이 아닌 ‘곤도와 관여된’ 히지카타의 일이었기 때문에…. 히지카타는 씁쓸한 맛을 애써 삼키며 대답했다.



“그런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



“아니라면 됐어요.”



한숨 섞인 부정의 말이 나오자마자 오키타는 말꼬리를 가로채듯 빠르게 끊어버렸다.



“…….”



“왜요? 내가 히지카타씨 일에 뭐 참견이라도 할까봐서요? 관심 끌 테니까 걱정 마요.”



“아니, 뭐.”



“나중에 곤도씨에게 설명정도는 해둘게요.”



내키면요. 하고 밉살맞은 추임새를 붙이며 오키타는 제 앞에 놓여있던 주스를 한입에 털어 넣고서 주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저 떠나는 것이 손톱만큼은 신경 쓰였는지 뒤를 돌아 본 녀석은 입술을 가느다랗게 말아 올리며 가서 야키소바 빵이나 사오라며 악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히지카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담았다. 혹여나 이대로 아주 인격이 바뀌어 버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아쉬워하지 않도록. 원인이나마 일러주었으니 아마도 괜찮을 것이라고 저를 다독였다. 서운함이나 쓸쓸함은 그 냉정한 뒷모습에 차마 댈 자리조차 없었다.







* *







오키타는 거의 매일 장난처럼 히지카타를 죽이려고 들었다. 부장자리를 내놓으라며 바주카포를 쏘거나 포탄을 머리위로 던지는 건 거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곤도는 그걸 보며 소고는 토시에게만 장난이 지나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고 다른 이들 역시 으레 그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곤 하였다.



다소 놀이의 범주를 벗어난 짓도 오키타라면 그럴 법 하다는 식의 분위기로 그들의 주변 환경은 굳어져갔다. 하지만 히지카타만은 알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어린애 같은 모습이 오히려 교묘하게 감추어진 아이의 처세술일 뿐이라는 걸. 아주 오래 전부터.



겉으로 보이는 그 어린애다움으로 속내를 치밀하게 감추고 있었기에 알아채기 힘들지만 오키타가 드러내는 건 전부 거짓투성이였다.



그게 언제였더라. 정확한 일시를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상황만은 똑똑히 기억하였다. 누나를 위해 목검을 빼들고 저에게 달려들던 석양이 깃든 저녁을. 한 번도 친밀하게 불린 적 없었던 저의 이름과, 녀석 답지 않게 중심이동이 형편없던 움직임과… 그리고 턱 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참아내는 숨소리마저. 한 순간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선명했다.



그렇게 원망에 가득 찬 울부짖음이 작디작은 아이에게서 뱉어져 나왔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득한 일이었다. 고작 여남은 살의 소년에게서 느끼기엔 너무도 지독했다. 마치 폭동처럼.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들을 아끼는 법을 배우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경애하는 마음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배워야 할 어린 녀석이 저에게서 배워간 건 빼앗기고 짓밟혀서 억눌린 채 참아내야 하는 증오였다.



만약 제가 좀 더 능숙하고 더 요령 있는 사내였더라면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어린아이를 짓밟진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곤 했지만 그 당시엔 저 역시 아귀 같은 형상의 수완 없는 애송이였을 뿐이었다.



아이의 입에서 끝내 견디지 못한 울음이 쏟아져 나오는 순간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미워하는 구나. 넌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벼리지 못한 차가운 칼날이 원수를 난도질 하고 싶어서 날뛰고 있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암담함.



그 날로 온 몸에 둘렀던 방어벽은 산산이 깨부숴졌다. 흉측한 것만을 남기고 모두 연소해 버린 아이는 후에도 줄곧 저를 싫어했다. 제가 가진 방어벽이 깨진 것처럼 녀석의 무언가도 조각조각 났는지 다듬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보이는 것에 두 번은 없었다.



증오를 갈무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마음을 능숙하게 연기할 수 있게 된 오키타는 그날처럼 살아 움직이는 실체를 보여준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그 끔찍한 것을 품고 있었다. 싫을 만큼 생생하게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꽁꽁 싸매어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는지는 몰라도 오키타는 가끔 능숙하게 그것을 꺼내 휘두르곤 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주시해왔지만 질기고 드센 원망은 조금의 풍화도 없이 그 곳에 있었다.

하물며 그런 너에게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라는 걸. 다 타버릴 줄 알면서도 밝은 빛을 향해 달려드는 한갓 벌레 같이.







* *







“피해! 선두 차량이 돌진한다!”



아슬아슬하게 차체와 기차 사이에서 버티던 히지카타가 소리쳤다. 양 옆에서 폭탄이 터지고 사방에서 총탄들이 날아드는 그곳은 이미 충분히 아수라장이었다.



눈 뜨자마자 엄청 부려먹는 군, 하고 팔자 좋은 탄식을 하며 히지카타는 서둘러 문을 여는 나머지 두 사람을 보았다. 마지막 기억이 해결사 사무소였던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토의 책략으로 이미 전력이 많이 부족해진 신센구미가 귀병대까지 상대하는 건 아마 무리였을 것이다.



그나마 긴토키들이 부족한 전력을 많이 보충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히지카타가 돌아올 때까지 이만한 피해로 버티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의뢰비를 경비 처리로 할까 말까 고민하는 새에 곤도와 가구라가 후미 차량의 문짝을 뜯어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다 멈칫 하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여길 새도 없이 선두 차량이 거칠게 돌진해 왔기 때문에 히지카타는 서둘러 멈춰선 이의 등을 떠밀며 저도 기차 안으로 들어섰다.



쾅, 하고 간발의 차로 선두 차량이 경찰차를 찌그러트리며 충돌해왔다. 일초만 늦었더라면 거기에 끼어 납작해지는 게 저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불길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어두침침한 내부에서부터 풍기는 비릿하고 구역질나는 그건 이미 수도 없이 맡아온 피비린내였다. 히지카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사방이 막힌 공간이었대도 이렇게까지 역하게 냄새가 나려면 한 두 구의 시체로는 어림도 없었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막연히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히지카타는 딱딱하게 굳은 곤도의 등 뒤에서 비스듬히 비켜났다.



어둠에 익숙해져 한층 더 선명하게 보이는 차량 내부에는 산더미 같은 시체들과 다 죽어가는 인간 한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밖에서 또 다시 폭탄이 터졌는지 일순간 시야가 번쩍 하며 그 빈사 상태의 사람을 비추었다. 히지카타는 그제야 왜 곤도가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시체 사이에 서있는 녀석은 그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난리통에 왜 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의심스러웠더랬지.



뭐 때문에 곤도의 옆자리를 비워뒀는지 나중에 추궁할 생각이긴 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진심으로 화도 내볼까 생각 했었는데…. 그 부주의함을 힐책하는 김에 저의 서운함도 아주 조금만 담아서 혼쭐을 내주겠다는 막연한 다짐이 산산이 부스러졌다.



히지카타는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의심했다. 아이의 부재가 궁금하긴 했지만, 어딘가에서 저 알아서 싸우고 있겠지 하고 녀석의 행방을 묻지 않은 건 설마 이렇게까지 미련한 짓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녀석에게는 저의 주군 단 한 명 말고는 지켜야 할 것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대체 왜. 그 녀석이 저기서 피를 토하고 있는 것인가.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뒤섞인 이 혼란스러운 작은 전쟁터에서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혼자 날뛰었을 이가 어째서 너였단 말인가. 대체 네가 어째서.



히지카타는 들고 있던 검을 힘없이 툭 떨어뜨렸다.






“가능하면… 지켜주고 싶었어요.”



소름이 끼칠 만큼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적막한 기차 안을 울렸다. 색색 거리는 숨소리는 곧 넘어가리란 걸 알리듯이 불규칙했다. 차량 바닥에는 붉은 핏물들이 고여서 히지카타가 얼빠진 얼굴로 아이에게 다가가는 내내 찰박찰박 소리를 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히지카타는 시야가 점점 하얗게 물들어 가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마가 깨졌는지 예쁜 다갈색 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녀석은 한쪽 무릎을 접은 채 바닥에 꽂아 넣은 검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후들거리는 팔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빤히 보였다. 너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느니 혀를 깨무는 게 훨씬 낫다던 언젠가의 오키타의 살벌한 말이 떠올렸다. 하지만 복부를 정확히 관통한 칼을 배때기에 꼽고 있는 상황에선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와중에도 아이의 자존심을 위한 합리화를 하던 히지카타는 왈칵 뜨거운 것이 목 끝까지 차오름을 느꼈다. 눈알이 시리고 코끝이 아려오는 건 몹시 생소한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뭐였더라. 기억이 날듯 말듯 한 이 울렁임은 살면서 몇 번 겪어본 적 없는 파동이었다.



“하지만, 곤도씨를… 혼자 둘 순 없잖아. 당신도, 없는데, 나까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가당치도 않은 핏덩이를 동반하고 있어서 소리를 먹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너를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가.



성한 구석을 찾지도 못할 만큼 오키타는 상처투성이였다. 동시에 모든 상처에서 피를 줄줄 흘려보내는 것이 정말 말 그대로 죽음에 문턱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당장 수혈을 받으면 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히지카타는 녀석의 혈액형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를 악문 턱이 덜덜 떨려왔다.



“삐졌어요? 다 큰 어른이… 쫌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점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



히지카타는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바닥을 적시는 무거운 핏자국들을 하염없이, 그저 하릴 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요검의 저주를 몰아낸 이후 온 머리에 뒤엉켜 있던 분노와 두려움과 각오가 아이의 울컥거리는 토혈에 모조리 지워져 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텅 비어버린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붉은 선혈이 마치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팔랑팔랑 꽃잎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기갈에 든 사람처럼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지만, 몸의 모든 기관은 일체 정지해버렸다.



기침을 쿨럭 거리자 검은 핏덩이가 쏟아져 내리며 오키타는 결국 바닥으로 추락했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여전히 투명한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히지카타를 응시했다. 



“…좀 웃어 봐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가 시야를 가려서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주제에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야 인마. 너라면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겠냐.



“마지막 가는 길인데.”



마지막 같은 소리 하네. 너 여기서 죽으면 가만 안 둔다. 



“미소쯤은… 가지고 가도 되잖아.”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는 말들은 많았지만 히지카타는 그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저 경직된 손을 오키타에게 뻗기만 하였는데도 아이는 그새 눈이 무거워졌는지 점점 가물거렸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오키타의 얼굴도 한껏 찡그려져 있어 마치 울먹임과도 같아 보였다.



녀석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귀를 꽉 틀어막고 바깥의 온갖 소음들을 차단시키는 것 같았다. 다음 일을 계산하고 경우의 수를 분석하던 머리가 그 상태에서 멈추어 버렸다. 말 그대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이 전쟁 한 가운데라는 것을 잊어버리고서 그저 상처 입은 채 쓰러져 가쁜 숨으로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는 아이만이 온 시야에 가득 하였다. 마치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만 같이 믿기지가 않고, 마치… 질 나쁜 농담인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대체 뭐야. 네가 언제부터 정의의 용사였다고. 1순위는 곤도씨 2순위는 자기자신이잖아.



네가 대체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다고… 그렇게나 울상인 얼굴로.



“…많이 미워요? 모른 척, 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히지카타는 칼바람이 불던 겨울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저 수면 맨 밑에 매몰되었던 기억이지만 어디선가 기폭제가 터진 마냥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는 그건, 신센구미가 결성되고 부슈로 올라온 직후의 정신없던 날들 중 하루였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냥 바빴다 라고만 기억될 날이었음에도 그가 그 겨울날을 어느 한 구석에 품고 있던 이유는 우연히 곤도와 아이의 대화를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오키타는 부장자리를 히지카타에게 뺏겼답시고 몹시 성질을 부리던 때였다.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다닐 기세로 분통을 터뜨리던 아이를 곤도가 조용히 불렀던 건 아마 달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날이 굉장히 추웠던 것이 기억에 있었다.



그 주 내내 내리던 눈이 마당에 소담하게 쌓인 채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것도. 물품 결제 잔금을 곤도에게 건네주러 그의 방을 찾았던 것도. 칼바람이 불긴 했지만 하늘이 겨울치고는 매우 높아서 청량했던 것까지 히지카타는 세세하게 기억을 건져 올렸다. 대원들끼리 눈싸움을 한 흔적이 역력한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며 곤도의 방까지 걸었더랬다.



담배가 똑 떨어져서 손에 든 잔금만 얼른 곤도에게 건네고 담배를 사러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앞에 다다라서야 히지카타는 이미 먼저 온 방문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 방문자가 중요한 손님이었더라면 그 한 뼘 쯤 열린 문을 모른 채 하고 다시 뒤를 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지카타가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옆 툇마루에 앉았던 건 손님이 다름 아닌 오키타였기 때문이었다. 둘이 하는 얘기라고 해봤자 어차피 자신에게 숨길만한 거리는 없겠거니 하며 히지카타는 심심한 입맛을 다셨다.



아마 그 때 담배를 피우고 있기만 했더라면 예민한 아이는 금세 히지카타가 문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도록 우연의 손이 닿기라도 했는지 모처럼 히지카타는 맨몸이었다. 열린 문틈 너머로 담담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을 꿇은 채 정좌하고 있는 오키타는 제복을 입고 있으니 도장에서 늘 보던 꼬마와 사뭇 달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 말은 뭐예요, 부장자리 때문에 히지카타 놈을 질투하느냐 이겁니까?’



‘…어…직역하자면 그런데, 또 그런 것만은 아니고. 뭐든 간에 소고 너 요즘 너무 사납잖아.’



막 자란 병아리 같은 녀석 앞에서 어미 닭은 곤란한 음성으로 다독였다. 제 아무리 무정한 소리를 던져봤자 오키타가 한 번 어미로 인식한 그를 물어뜯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곤도는 언제나 아이에게 다정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정함이 병아리를 길들이는 것임을 아주 뒤늦게야 히지카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할 것도 없는 게 안다 해도 그는 결코 오키타를 길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알잖아요 곤도씨. 난 그냥 그 녀석이 재수 없는 것뿐이라고요. 그냥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털렸다니까? 날 때부터 나랑 파장이 안 맞는 DNA를 타고났다는 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숨 쉬는 것까지 죄다 날 거슬리게 할 리가 없잖아요?’



거 미안하네, 숨 쉬는 것까지 거슬리게 해서.



히지카타는 이마에 불쑥 튀어나오려는 혈관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이를 갈았다. 당장 들어가서 뒤엎을까 하다가도 곤도가 자신의 방까지 아이를 부른 걸로 보아 오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건가 싶어 일단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럼 나한테 서운한 거야 혹시? 토시에게 신센구미 부장을 맡긴 거 때문에….’



‘됐어요. 감투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어요. 부하들 이끄는 거라던가 어차피 그 사람이 더 잘할 텐데 뭘. 나보다 어울리는 사람한테 줬다는 거 알아요.’



너무 선선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곤도보다는 오히려 밖의 히지카타가 더 놀랐다.



언제나 부장자릴 내놔라 하는 게 권력에 대한 욕심인 건가 싶었는데 그저 자신을 향한 반발이었을 뿐이라는 게 새삼 놀라우면서도 과연 기뻐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내가 싫다는 뜻인가 싶어 울컥 치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녀석의 속내가 단순히 욕심에 찌든 게 아니라는 것이 안심도 되었다.



조직 내의 일 이등을 다투는 실력자가 오키타였으니 그 속이 권력욕으로만 물들었다면 신센구미가 얼마나 위태롭겠어. 하고 주억거려봤지만 정작 제 진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히지카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게 이로운 일이 종종 있다는 것도.



그래서 히지카타는 또 다시 아이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뺏어버린 게 아님에서 오는 안도감을 없는 척 의식 저변에 감추어버렸다.



‘내가 원하는 건 곤도씨 옆자리에요. 오히려 평대원인 편이 더 좋다고요.’



‘하하, 마음은 고맙지만 소고. 신센구미에는 네가 필요해… 나 말고도….’



‘너스레 떨지 마요. 그럴 필요 없으니까.’



오키타는 여상한 목소리로 곤도의 말허리를 잘랐다.



‘어차피 내가 뭘 바라는지 다 알면서도 1번대 대장에 앉혀놓은 거잖아요. 책임감 어쩌고 하려고 일부러 감투 씌워놓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히지카타는 그 얘기를 들으며 아까보다 한층 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더랬다. 아이가 설마 눈치 채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오키타는 사실 신센구미가 결성되었을 때 그들이 저를 놓고 갈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아마 제가 얼마나 괜찮은 실력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그와는 별개로 곤도에게 녀석을 두고 가자고 말했었다. 아마 당신에겐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신센구미 자체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일갈과 함께.



다른 사람에 대한 욕심이나 원대한 포부와 이상 같은 건 아이에게서 찾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제 누나와 곤도, 단 두 사람을 위해 돌아가고 있는 그 어린아이를 조직에 쓸 수 있겠냐고 그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속에 품고 있는 진심이 무엇이든 간에 겉으로 듣기에 그건 꽤나 설득력 있는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곤도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에도로 올라갈 채비를 하는 아이를 끝내 놓아 버리지 못하였고 차선책으로 녀석을 대장자리에 앉혔다.



의무감과 책임감을 얹어주면 오키타도 좀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혹여나 오키타가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히지카타는 뒷덜미가 오싹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황망하게 방 안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순간 문틈 사이로 빛나게 구르던 홍안과 마주쳤다. 들키지 말아야할 것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한 히지카타와 달리 오키타는 별달리 놀라는 기색 없이 말간 시선만을 던졌다.



아주 느리게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그냥 확신에 찬 미소였고, 어떻게 보면 질 나쁜 미소였다. 오키타는 히지카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놀라우리만치 진지한 음성이었다.



‘곤도씨가 신센구미의 깃발. 그리고 히지카타씨가 그 깃발을 지키는 최후의 검이라면…. 내가 기꺼이 수문장이 되어드릴게요.’



잠시 뜸을 들인 오키타는 다시 곤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얼굴에는 보다 부드러움이 서려있었다. 포근한 햇살을 맞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풀어진 오키타의 얼굴에는 담담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온전히 그러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을 곤도의 표정이 어떠할지 히지카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빛나는 충의는 같은 길 위에 선 사람조차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만치 아름다웠으니까.



‘걱정 마요. 전부 다, 내가 지킬 테니까.’






우리에게 칼끝을 겨누는 자들을 섬멸하겠다던 아이를 히지카타는 분명히 그 겨울날에 듣고 있었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조그맣던 어린 소년은 어떻든 간에 신센구미에 들어왔고, 그곳을 아끼고 있었다는 것을.



지켜주겠다고 주군 앞에서 맹약하였던 것을. 몸이 자라듯 마음 역시 자랐지만 여전히 삐딱 선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녀석일지라도 곤도를 해하려는 이토 편에 붙어서까지 부장자리를 욕심낼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붉은 빛 속으로 무채색의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결국 오키타의 옆에 주저앉아 버린 히지카타는 멍하게 피로 얼룩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역시나 예쁜 머리카락.



언제나 그 물결치는 머리칼을 보면서 만지면 살랑살랑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심연처럼 깊고 짙은 눈동자도. 얄미운 소리만 재잘거리는 그 입술도. 가늘고 선이 예쁘지만 상처로 가득한 손도. 비 개인 하늘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웃던 미소도. 줄곧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싸늘하게 변해버린 지금이 아니라…. 따뜻하고 생동감이 넘치던 너의 것으로.



“이봐 소고…”



뺨에 가져다 댄 손은 생각지도 못한 차가움에 움찔 떨었다. 흘러내리는 네 피는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몸이 이렇게 빠르게 차가워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약속이 다르잖아…”



홀로 그 빛깔이 다른 물방울이 계속 핏물위로 떨어지며 농도를 희석시켰다. 하지만 목 앞에 드리운 죽음만은 어떻게도 희석되지 않는 것인지 오키타는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너 때문에 내가 몇 대 일로 싸웠는지 알고나 있냐고, 대체 뭐 하다가 이렇게 늦었냐고 타박이라도 할 것이지, 끝내 제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만 하다가 가버린 미련한 놈이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오키타는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다고.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올만한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제가 먼저 아이를 버렸는지 아이가 저를 버린 것인지도 분명치 않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 하기 싫은 소리와 히지카타가 듣기 좋은 소리 두 가지는 안 할 만 한 인물이 자진해서 미안하다니.



이보다도 더 거짓말 같은 일이 없었다.



“일어나. 너 지금 거짓말 하는 거지?”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설마 현실은 아닐 거라고 애써 의식을 정돈하려 해봐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제발 누가 이 빌어먹을 꿈에서 깨워달라고 심장이 부르짖었다. 하얗던 시야가 까맣고 빨갛게 물들다가 이내 점멸했다 번쩍거리며 요동쳤다.



이젠 피도 멈추려는 것인지 아이의 머리 위로 흐르던 붉은빛이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자꾸만 제가 아는 시체로 아이가 변해가는 것이 무서워 히지카타는 그 손을 움켜쥐었다. 질리도록 봐왔던 사람의 숨이 끊기는 장면을 왜 지금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어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 대상이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라는 건 웃기지 않는 장난이었다. 아니, 장난이어도 이건 지나치게 질이 나빴다. 남의 심장을 고장 내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일어나… 일어나!!"



히지카타는 핏기 없이 늘어져 버린 손을 붙들고 억지로 녀석을 끌어 일으켰다. 하지만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그는 웃지 않았다. 조용해진 귓가에는 연신 히지카타씨 지금 우는 거냐고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음에도 손안에 쥐어진 몸뚱이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등 뒤에서 오열하는 곤도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흩어졌다.







* *







담배를 붙든 손이 불안정하게 경련했다. 해결사 식구들은 하나같이 숨죽여 남자에게서 튀어나올 말을 기다렸다.



“나의…, 우리들의 신센구미를… 지켜 줘.”



길이가 모자란 전선을 억지로 이은 모양새로 간신히 말을 내뱉은 남자는 이내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당황한 신파치가 서둘러 그를 일으켜 세우러 달려가고 가구라는 찬물을 떠오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곤란하게 됐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던 긴토키는 흘끔 장지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가지런히 열을 맞추고 있는 구둣발이 보였다. 문에 가려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애석했다.



“이 녀석 잠들었어. 이제 그만 나와.”



긴토키의 말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인형이 타박타박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가 두고 간 신센구미 제복을 한 손에 그러쥐고 있던 녀석은 탁자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보다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이는 히지카타가 신파치에게 이끌려 해결사 사무실로 들어오는 순간 어떠한 말도 없이 문 뒤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왜 제정신이 아닌 톳시녀석 앞에서까지 모습을 숨기나 했더니 놀랍게도 그 짧은 찰나 히지카타가 돌아올 것을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동물도 아니고 이렇게 본능대로 사는데 그 직감이 들어맞는다는 건 비슷한 삶의 방식을 표방하는 긴토키에게조차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흥미롭다는 긴토키의 시선을 마주보면서도 가타부타 설명 없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제복 위에 반듯하게 봉투를 놓아두며 오키타는 낮게 웃었다.



“불청객이 끼어들긴 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아까 다 했죠? 의뢰비는 여기 있어요.”



“너 말고 오쿠지군의 의뢰도 받았거든? 이 녀석은 너네 신센구미를 지켜달라는데?”



“내가 먼저 왔잖아요. 이 자식 말 듣지 마요. 이젠 신센구미도 아닌 주제에.”



“얼씨구? 그럼 이제 상관도 아닌데 넌 뭐하러 이 녀석을 지켜 달래?”



“내가 언제 지켜 달랬어요. 감시해 달라고 했지.”



“이봐 소이치로군. 그런 거짓말을 믿게 하고 싶으면.”



일단 그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부터 어떻게 좀 해봐.



긴토키는 손을 들어 오키타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가득 달려있는 염려와 불안과 걱정의 잔해들은 사라지질 않았다.



의외로 정직한 녀석일세.

긴토키는 아직 멀었다는 듯 혀를 찼다. 오키타가 다짜고짜 사무실에 쳐들어 와 의뢰가 있다고 선불이니까 다른 거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긴 하였다. 절박해 보이는 꼬맹이가 신선해서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자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이렇게 복잡하게 꼬인 남의 집 사정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거기에 복잡하게 꼬인 감정까지 곁들여 졌다면 뭐 두 말 할 필요가 있나.



당장이라도 칼 같이 끊어버려야지 하고 생각하던 긴토키도 그 소매를 꼭 틀어쥔 자그마한 손을 보고 있노라면 할 말이 없기 마련이었다. 신선함을 쫓다가 내가 오히려 신선해지겠어. 긴토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짧은 사이 마음의 갈무리가 끝났는지 오키타가 제 눈을 가린 손을 떼어냈을 땐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난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새파란 꼬맹이가 어른 앞에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나 하고.”



“…….”



“거짓말을 할 거였으면 치밀하게! 응? 처음부터 들키지 라도 말던지. 이래서 요즘 청소년들이란.”



“…저기요 형씨.”



“왜?”



“형씨는 입으로 내뱉는 것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도 없나요?”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난 있어요. 적어도 이건 내 마지막 방어벽인 셈이니까…. 여기서 물러나면 휩쓸리게 돼버린다는 거 똑똑히 알고 있어요.”



“뭘 방어하는데?”



“방금 얘기 했잖아요. 말하지 않을 거라고.”



“아 어린 녀석이 진짜 까탈스럽네. 그럼 남이 말해줘? 여기 이 마요귀신이 걱정 되서 미칠 지경이에요. 그걸 니 입으로 말하기 싫다 요거냐?”



망설임 없이 뱉어버리는 그 무신경함에 오키타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확 찌그러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두터운 가짜 얼굴 뒤로 숨어버린 그 굳어진 낯이 쉽사리 상상이 갔다. 뻔뻔한 낯으로 제 표정을 구경하는 긴토키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오키타는 눈을 치켜떴다.



“이런 소리까지 잠자코 들은 마당에 내 부탁 안 들어 주면 진짜로 죽일 겁니다.”



“소이치로군. 누굴 좋아한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게 아냐. 왜 너 그 고릴라나 이쁘장한 누님 좋아한다고는 깃털처럼 가볍게도 말해놓고서?”



“소고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그 고릴라와 예쁜 누나를 뺏어간 놈이거든요? 이 녀석을 미워하는 걸 멈춘다는 사실만으로 난 충분히 자존심 상해요.”



긴토키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똑 부러진 구석도 있는 주제에 동시에 아직 전 어리다는 것을 보여주고픈지 이상한데서 억지를 부리는 눈앞의 고집쟁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구라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애들 가정교육을 어지간히 말아먹었구만. 가구라는 외계인이라고 쳐도 이 녀석은 순 혈통 지구인 아냐? 이 나라의 미래란.



치미는 안타까움에 눈 밑을 훔친 긴토키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 덜 큰 것 좀 보게. 그래서 감정이 니 마음대로 통제가 된대? 싫다 좋다 그게 막, 마음대로 돼?”



“안 될 건 또 뭐랍니까. 난 이 사람을 싫어해야 해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서 내 소중한 것들을 단번에 뺏어가 버렸는데 내가 밸도 없습니까. 난 그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죽어라 노력했어요. 근데 이 자식은 이미 그것들을 다 갖고 태어났는데 내가 얼마나 박탈감 느꼈는지 상상이나 하겠어요? 내가 애써서 얻을 것들을 죄다 손쉽게 가져버리는데….”



단숨에 뱉어내는 말들은 꽤나 오래 응어리져서 녀석의 마음을 틀어막고 있는 강박관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빛깔이 바래지 않는 건 의지가 강하다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 녀석을 부탁하는 건데?”



“……몰라요. 나 없는데서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



“…뭐요.”



“니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지?”



“아닌데요.”



“모르는 모양인데 말이 무섭다는 건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이야. 계속해서 거짓말만 하다보면 듣는 쪽 입장에선 그게 진실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진지함을 담아서 얘기했지만 아이는 그저 엷게 웃기만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어머니 같네요, 형씨.”



“인생 선배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다.”



“…미련한 고집이라는 거 나도 알아요. 언젠가 지치는 날이 오겠죠.”



“그게 언젠데.”



“글쎄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 쯤?”



“…이 녀석이 퍽이나 기다려 주겠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댔어요.”



“거 참 좋은 얘기 듣네, 아저씨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거야?”





긴토키의 성난 목소리에 오키타는 배시시 웃었다. 마지막 남은 짐더미 하나를 막 남에게 떠넘긴 만큼 어깨가 한결 가벼웠다. 눈앞의 남자는 관심 없어 보이는 척 해도 꽤나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거라는 걸 믿었다. 다 끝난 뒤에 그간의 이자까지 합쳐서 몇 배로 괴롭혀 주겠다고 생각하며 오키타는 그곳을 나섰다. 당신의 신센구미는 안 그래도 내가 잘 지킬 거라고 입 밖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죽을 때가 된다면 한번쯤 그의 말대로 히지카타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을까.



멈춰 선 당신을 놓고 가버려 미안하다고.



그 길 위에 홀로 남겨두는 게 못내 걱정되었더라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볼 만큼 기다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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