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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타. 오늘 시간 좀 있어?”



“…아, 무슨 일인데요?”



“그게 말이지, 이번에 기숙사 이사하잖아. 짐 나르는 것 좀 도와달라고.”



강의가 끝나고 전공서를 덮던 히지카타의 귀로 듣기 싫은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책을 빠르게 가방으로 쓸어 담으며 히지카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교를 담뿍 담은 여자의 목소리가 못내 거슬렸다. 오늘로써 연속 나흘째였다. 오키타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여자가 녀석의 팔을 붙드는 걸 보는 게.



차라리 한 번에 몰려들기라도 했으면 저들끼리 싸우는 통에 거절을 하는 수고가 다소 줄어들었을 텐데 그녀들은 결코 겹치는 일 없이 하루에 한 명씩 순서를 지켜가며 찾아들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순진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그 뒤에선 어떠한 말들이 오갔을까.



심지어 오늘 찾아온 상대는 오키타의 동기도 아닌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 학교도 듬성듬성 나오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정보가 돌기는 돌았는지 밥을 사주겠다느니 노래방에 가자던가 하는 가벼운 멘트는 아니었다. 하긴 어디서 외모로는 빠지지 않는다는 애들도 대놓고 작업을 걸다가 내리 세 명이나 거절당했는데 소문이 나기는 했겠지. 



“짐이 제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많습니까?”



그 좁은 기숙사에 뭐가 얼마나 많이 들어간다고 친하지도 않은 남자 후배를 붙잡느냐며 오키타는 거리낌 없이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입꼬리에 가느다란 미소가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방이 워낙 어지러워서 혼자는 제시간에 정리를 못할까봐 그래. 아마도 짐정리 하다보면 네가 찾고 있던 작년도 기출문제 전부는 아니지만 세 과목정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필요하면 너 줄게.”



“…정말이에요?”



냉랭하던 오키타의 목소리가 조금 반가운 기색을 띄었다. 역시 연륜이 있는 지라 거절하기 어려운 미끼까지 준비를 해 놓은 늙은 여우는 어리기만 하고 요령이 없던 녀석들보다 조금 더 교묘했다. 히지카타는 소리 없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거절해, 거절하라고! 



그까짓 기출문제 나부랭이는 저 역시 세과목이 아니라 1학년 학부기초 과목 전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키타가 선배들을 붙잡고 기출문제를 구하고 있단 소문을 듣자마자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전공서와 자료를 전부 긁어모아서 보기 편하도록 정리하였다. 단원별로 나열해 보기도 하고 주제별로 묶어 보기도 하면서 문제뿐이 아니라 이전의 필기자료까지 하나씩 타이핑하며 히지카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을 꼬박 지새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벌써 일주일도 지난 일인데 여태껏 오키타에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일은 반드시 건네 줘야지 생각만 하며 하루 이틀 미루던 것이 오늘 이렇게 빌미를 제공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어떻게든 손을 썼을 것이다. 하다못해 녀석의 사물함에 익명으로 넣어두기라도 할 것을.



히지카타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대신 나 오늘 꼭 좀 도와주라.”



여자는 ‘꼭’에 힘주어 말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언뜻 성취욕이 피어오른 얼굴이었다.



“…몇 시까지 가면 되나요?”



녀석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히지카타는 거친 손길로 가방을 쾅 내려놓았다. 아직 강의실을 나서지 않은 학생들이 큰 소리에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드커버의 전공서가 든 가방은 제법 큰 소리를 냈다. 속에선 불길이 치솟았지만 겉으로는 표나지 않도록 얼굴을 가다듬은 히지카타는 내려친 가방을 다시 유유히 둘러메고 문으로 걸어갔다.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하고 단정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몸을 반쯤 넘기다 문득 멈춰선 그는 자연스럽게 오키타를 향해 고개를 힐끔 돌리고 입을 열었다.



“오키타 어제 회의기록 정리 안하고 갔더라. 오늘 중으로 다 끝내놔.”



서릿발이 내린 말씨에 오키타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히지카타 역시 내뱉은 말투가 지나치게 고압적이라 속으로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스쳐지나가듯 그들 대화의 맥락만을 끊을 생각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강압적인 명령이 나왔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움이 접착제처럼 그의 다리를 강의실 문 앞에 붙들었다. 하지만 이미 했던 말을 어떻게 주워 담는단 말인가.



결국 이렇게도 저렇게도 수습하지도 못한 채로 히지카타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과하자. 어차피 조금 뒤에 학회실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히지카타는 오늘도 마법의 주문 ‘나중에’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너 저 선배에게서 미움 받고 있는 거 아니냐는 걱정스러운 소리와 설마 총학에서 저런 대우 받고 있냐는 적대적인 목소리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려왔다. 역시나 기우가 아니라 정말로 제 목소리가 퉁명스럽고 사납기는 했던가보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어쩐지 결과는 제 의도가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방향으로 왜곡되었다. 



하지만 새삼 놀랍지도 않은 것이 그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상황에 떠밀려 녀석에게 말을 걸던 때에는 늘 이런 꼴이었다. 그저 급한 마음에 허둥댔을 뿐인데 안하느니만 못한 말들만 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답답한 적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스로가 이렇게 답답한 사람인 것을 알게 할 만한 계기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의 여자들을 만나보았지만 한 번도 그녀들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 휘둘릴 만큼 마음을 줘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이것이 정상적인 좋아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도를 넘어선 이상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키타를 처음 본건 몇 개월 전 뒤늦은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하지만 봤다는 건 말 그대로 얼굴을 봤다는 뜻이고 이름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름마저도 생소하기엔 녀석이 지나치게 많이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두세 시간의 짧은 행사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입학식이 끝난 직후, 이미 녀석에겐 온갖 소문들이 꼬리표처럼 붙어있었다. 그중에서는 녀석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도 있었고 성격에 관한 험담도 있었고 연상의 누님들을 끼고 다닌다부터 시작해서 뒷배에 폭력조직이 있다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루머까지 다양했다.



그맘때만 해도 학생회에 매여서 후배들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던 히지카타에게까지 녀석의 이름은 심심치 않게 들려올 정도였으니 아마도 동기들 사이에서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파란에 휩쓸리고 있을 어린 후배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이 들기도 하였던 지라 히지카타로써도 녀석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소문이 자자한 후배의 얼굴을 보기엔 입학식도 오리엔테이션도 모조리 불참할 만큼 바빴고 결국 학기 초의 자질구레한 이벤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인 신입생 환영회가 되어서야 겨우 그 유명한 상경대 왕자님의 얼굴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나마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닌 저에게 일을 모조리 떠맡기고 사라진 학생회장 곤도를 찾기 위해서 간 자리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운 소음이 왈칵 몰려드는 술집은 그도 작년에 신입생 환영회를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곤도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찰나 통로 쪽에 앉아있던 제법 친하게 지낸 동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게 누구야! 히지카타 너 올해 들어 처음 보는 것 같다? 뭐가 그렇게 바빠.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얼굴 좀 자주 비추지 그래.’



‘그래 오랜만이다. 나 자주 보고 싶으면 우선 기획서부터 제때 내라.’



‘야 그래도 우리 과는 겨우 하루 밖에 안 늦었어!’



‘됐고. 나 놀러온 거 아니야. 고릴라 어디 있어?’



‘하하 시어머니 같기는. 선배님은 세 번째 테이블에 계신다.’



동기가 가리킨 세 번째 테이블로 향하며 대강 둘러본 환영회 장소는 술집을 통째로 빌렸는지 온통 같은 과 학생들로 북적였다. 벌써 시작한지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뻗어버린 녀석들이 널려있기도 했다.



히지카타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모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로 나와서인지 긴장이 느슨해짐을 느꼈다. 여기서 급한 안건을 던져놓고 혼자 도망나간 곤도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에 맥주라도 한 잔 마시면 그간 쌓인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입맛을 다시며 목표물을 찾던 히지카타의 눈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이놈의 의지박약 회장 같으니.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의 앞자리로 향한 히지카타는 이미 앉아 있던 후배 한명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연신 옆자리를 보며 헤실 거리던 곤도는 히지카타가 테이블을 크게 차올린 뒤에야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야차 같이 노려보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곤도는 너 언제 왔느냐며 해맑은 목소리로 히지카타를 반겼다.



퇴근길에 한 잔 걸친 샐러리맨 같이 허허 웃으며 곤도는 상기된 얼굴로 마시던 맥주를 그 앞으로 밀어주었다. 어쩜 분위기 파악을 이렇게도 못할까. 히지카타는 어이없이 헛웃음을 뱉으면서도 전의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깽판을 치고 싶던 마음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걸 보면 오늘도 뒤엎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하여도 결국에 지는 건 히지카타였다. 만약 그가 곤도에게 이길 수 있었더라면 아마 처음부터 학생회 따위에 낚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히지카타는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한숨을 삼키고 이젠 만사가 다 귀찮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넘긴 맥주를 받아 들이켰다. 목으로 시원하고 청량한 음료가 한 모금 넘어가는 순간 어딘가에서 매우 신경을 긁는 뾰족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문제의 시선 쪽으로 흘끔 눈을 돌렸더니 곤도의 옆에 앉은 자그마한 녀석이 활활 타오르는 눈초리로 저를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음에도 히지카타는 한 눈에 그가 바로 화제를 몰고 다니던 신입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을 보자마자 히지카타는 어쩐지 소문을 달고 다닐 만한 얼굴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창백하리만치 투명한 피부와 맑은 눈망울이 자칫 순해 보이는 인상을 만들 뻔, 하였다. 아마도 그 형형한 표정만 아니었더라면….



사박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속눈썹이 몇 번 깜빡이더니 잘 벼린 칼날 같은 눈빛을 하고서 히지카타를 향했다. 사람 여럿 잡았을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이 녀석이 까딱 고개를 숙이는 대로 흔들렸다.



녀석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야생동물 같았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며 반항기 가득한 태도는 분명 건방지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멸종 직전의 희귀종을 보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만약 녀석이 뒷골목 깡패처럼 생겼더라면 아마도 위협적으로 보였을만한 첫인상 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오키타의 외양 중에 무서운 구석이라곤 남을 집어삼키려 드는 눈빛뿐이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말 어디서 곱게 빚어온 인형 같은 녀석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녀석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과 얘기를 하던 곤도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이쪽을 향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키타는 살벌한 눈길을 거두어갔다. 



‘소고 왜 그래?’



‘뭐가요?’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었다. 아까의 그 비틀린 표정은 어디다 버렸는지 오키타는 순하고 여린 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곤도를 향했다. 애교를 한껏 담은 그 눈망울을 보며 곤도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충족감과 만족감이 살짝 휘어진 눈꼬리에서 뚝뚝 떨어져 나왔다.



저에게는 그렇게 찬바람 쌩쌩 불던 녀석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히지카타는 일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오키타의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며 쑥스러운 듯 옅게 미소 지었다. 여태까지 그의 주변에 겹겹이 끼어있던 필터가 순식간에 거둬진 느낌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천둥번개를 내리던 황무지가 그를 기점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꽃이 활짝 핀 너른 꽃밭으로 바뀌었다.



그건 말하자면 야생동물이 누군가의 손길에 길들여지는 순간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고는 한조각도 섞이지 않은 녀석의 웃음에 갑작스럽게 얼굴이 화끈해지며 목구멍으로 뜨거운 무언가를 삼킨 기분이었다. 부피를 점점 키우던 데일 듯 뜨거운 무언가는 식도를 타고 천천히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내려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언가가 바로 모든 변화의 기점인 것 같았다. 그것이 생겨버린 이후로 아무 이유 없이 잘 모르는 후배가 신경 쓰이고 시선이 가고 생각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바쁜 일상에 커다란 방해물 하나가 생긴 것이 너무 거추장스러웠지만 막상 버리려고 해봐도 그 감정은 손끝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도대체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미처 스스로의 맘을 추스르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태클은 어찌나 많이 들어오던지.



오키타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녀석이었다. 그냥 얌전히 학교만 다녀도 파란이 잦은 후배를 안전한 곳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학생회에 들어오는 걸 반대했다가 원망스러운 눈빛만 다발로 먹은 히지카타는 끝내 녀석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헛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잠잠해졌고 곤도를 따라 학생회까지 들어온 녀석은 점점 활동반경과 마주치는 사람의 범위를 늘려갔다. 꼬여드는 시선이 늘어날수록 그럴 듯한 부정 한 번 못해본 마음은 이미 짐을 다 풀어놓고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거칠게 몰아붙이는 주변 환경 덕분에 히지카타는 결국 그렇게 꼬일 만큼 꼬여버린 짝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일이었다.







* *







역시나 미뤄두었던 다음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교수 마음대로 추가한 보강 때문에 히지카타는 오후 내도록 강의실에 붙잡혀 있어야했다. 간신히 수업을 마치고 학회실로 향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도 아니었으니 아마도 오키타는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하면서도 히지카타는 거의 달리듯이 학회실로 향했다.



1층을 제외하고 전등이 전부 꺼진 학생회관은 스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천천히 어두운 계단을 밟아가며 3층까지 올라갔다. 비스듬한 경사면에 지어진 학생회관은 3층에만 출입구가 세 개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올라온 경우에는 이상한 모양으로 꺾인 모퉁이를 세 번이나 돌아야 비로써 학회실이 나왔다. 마지막 모퉁이를 떨리는 마음으로 끼고 돌자 눈앞에 두꺼운 철문이 보였다.



왼쪽 귀퉁이의 손바닥 두 개 만 한 창문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심장은 어느새 두근거리며 뜀박질을 시작하였다. 히지카타는 고작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요동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발소리를 죽여 문으로 다가가는데 희미한 대화 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두개의 목소리 모두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오늘내로 다 정리하라고 했다고?’



‘네. 안 해놓으면 아주 죽일 기세로요.’



‘…이상하다. 토시가 그런 애가 아닌데. 게다가 이건.’



‘더 말하지 마요. 주에 세 번씩 있는 회의기록을 여태 정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정도는 저도 이미 아니까. 그냥 나한테 일이 시키고 싶었나 보죠.’



문가에서 귀를 기울이던 히지카타는 뜨끔한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며 미간을 구겼다. 들뜨던 기분이 가라앉고 미안함과 낭패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악의 없이 뱉은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더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흘러가게 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제가 했던 말을 지키려 정말로 오키타가 아직까지 남아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오키타는 언제나 버스가 일찍 끊긴다며 한창 뒤풀이를 하던 중일지라도 칼같이 시간을 지켜 일어서던 녀석이었다. 그런 애가 이런 귀찮은 일 때문에 아직까지 학회실에 남아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그렇다고 녀석이 평소에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착실한 성격이었던 건 물론 아니었다.



아마도 낮의 일이 굉장히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오키타에게 이런 오기를 불어넣은 건 십중팔구 히지카타의 고압적인 태도였다. 녀석이 생각하는 게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올라서 히지카타는 담배를 하나 빼들었다.



‘소고. 내가 내일 잘 말해줄 테니까 그만 하고 집에 가자. 응?’



‘절대 못가요. 무조건 다 해서 그 면상에 집어던지기 전까진!’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히지카타는 연기를 내뱉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마도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나머지 한사람, 곤도를 위해서라도 그는 이쯤에서 들어가 사죄의 의미로 한 대 맞고서 녀석들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타고 다니던 버스가 말도 못하게 일찍 끊기던 것 같은데 아직까지 남아 있을지 걱정이었다. 차로 가도 두 시간이나 걸린다고 했는데 만약 없다면 어쩌지. 다른 녀석 집에서 재울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회실이나 과실에서 재우기엔 보안이 너무 위험한데. 우리 집…은 싫다고 하겠지. 그래.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작은 삐그덕 소리에도 두 사람의 말소리가 멈추었다. 문을 반쯤 열자 안쪽에서 타죽일 것만 같은 눈빛과 원망스러운 눈빛이 나란히 저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정 가운데에 위치한 회의용 책상에는 다소 흐트러진 모습의 오키타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 초조해 보이는 곤도가 서 있었다. 책상 위엔 두터운 뭉치의 서류들이 여기저기 쌓여있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오키타가 이곳에서 일 더미에 파묻혀 있었는지 짐작케 하였다. 도끼눈을 뜬 녀석이 저를 쏘아보는 것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곤도가 말을 건넸다.



“토시…. 회의 기록 같은 건 그냥 형식적인 거잖아. 그걸 왜 굳이….”



곤도는 굳이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마 누구보다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남자는 오키타가 제게 어떻게 구는지 그리고 제가 오키타에게 어떻게 하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저 생각하는 게 바로 얼굴에 드러나는 남자의 걱정스런 눈빛은 진심일 것이다. 물론 틀렸지만.



대체 왜 오키타를 미워하는 거야, 라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히지카타는 곤도를 붙잡고 구구절절 제 어려움에 대해 성토할 마음이 있었지만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그는 그저 건드리기 힘든 폭탄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을 염려했다. ‘나도 내가 답답해.’ 라고 고백할 수라도 있다면.



히지카타는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뱉어내었다. 세모꼴로 눈을 치뜬 오키타는 여전히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저를 부라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다 절 화형 시킬 기세였다. 답답하게 숨이 막혀왔지만 그보다는 초조해 보이는 곤도를 내보내는 게 더 시급했다. 그가 오늘따라 왜 저렇게 잘 차려입었는지 들은 바가 있던 히지카타는 곤도에게 어서 가라며 입구로 손짓했다.



“오늘 무슨 모임 있다며.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아, 그게….”



오키타의 머리칼 위로 곤도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난감한 듯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오키타의 표정은 다소 누그러졌다.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오키타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있었어요?”



“응. 그거 때문에 바빠서 너 이러고 있는지도 지금 알았네. 미안.”



“괜찮아요. …그럼 곤도씨 빨리 가요. 나도 그만 하고 집에 갈 테니까.”



“…그럴래?”



어지간하면 어색한 사이인 둘만 남겨두지 않을 남자였지만 2주나 전부터 중요하다고 노래를 불렀던 자리를 가는지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곤도는 오키타와 히지카타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뭐 부회장도 오셨고,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오키타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약속을 어기는 짓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예상대로 곤도는 연신 오키타의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도닥여주더니 히지카타를 향해 이 녀석 집에 얼른 들여보내라는 눈짓을 보내곤 이내 학회실을 나섰다. 히지카타가 들어오며 열어 놓았던 문이 곤도가 나가며 다시 닫혔다. 묵묵한 침묵이 몇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을 메웠다.



온 얼굴에 시무룩한 빛이 가득하던 오키타는 어느새 표정을 가다듬고 멈춰 있던 펜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더니 정작 그의 앞엔 아직 절반도 넘는 기록들이 정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는 가겠다고 해놓고서 사실은 그만 둘 마음이 없었는지 녀석의 하얀 손은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오늘은 늦었으니까, 라며 히지카타가 돌아갔더라면 오키타는 밤새 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서류정리를 끝마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런 고집불통인 점까지 모두 해서 히지카타는 녀석이 신경 쓰였다.

히지카타는 낮게 숨을 내쉬며 오키타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눈으로는 쉼 없이 움직이는 녀석의 펜 끝을 바라보며 손으로는 그의 옆에 뭉치로 쌓여 있는 서류를 가져다 정돈했다. 사각 거리는 펜 소리와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침묵을 깨고 공간을 점령했다.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도 히지카타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살갑게 구는 것도 아니고 싹싹하거나 넉살좋게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닌 그냥 귀엽지 않은 후배일 뿐이다. 살살치는 눈웃음이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곤도에게만 하는 행동이었다.



옅은 색의 머리칼과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더 짙은 빛깔의 눈동자 역시 남들의 이목을 끌긴 하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예쁘장한 얼굴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무슨 연유로 이 녀석이 남의 마음에 가장 큰 방을 꿰어 차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왜 안 보이면 마냥 걱정스럽고 보고 싶은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녀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사각거리던 펜 소리가 뚝 멈추더니 오키타가 고개를 휙 들었다. 눈이 갑작스럽게 마주쳤다. 손끝이 움찔 떨렸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머리통에 직격으로 와서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미안. 이 시간까지 남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말은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오전과 다르지 않은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이젠 딱딱한 말씨가 입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힐끔 고개를 들어 마주 본 오키타는 생각보단 사납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사납지 않은 걸 넘어 조금 놀란 얼굴로 깜빡거리는 눈망울이 그에게 보여준 표정치고는 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의아함을 가득 담은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갤 기울였다. 제 의중을 가늠해보는 건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니면요?”



“…그냥, 오늘 못하면 내일하고.”



“아까랑 말이 다른데요?”



“…….”



“뭡니까 금붕어도 아니고.”



“어이, 후배.”



“왜요 선배님.”



“뭘 그렇게 사사건건 따져.”



“선배님이 금붕어 같이 구니까요.”



“대체 니가 언제부터 오늘일은 오늘 끝내는 성실한 녀석이었다고 그래!”



“그래서 설마 제 탓 이라는 겁니까?”



“…아니.”



대답이 슬쩍 늘어지며 히지카타는 다시 멈춰 있던 손을 움직였다. 책상 업무는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곤도 덕분에 어지간한 사람들의 배 이상은 빨리할 자신이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둘은 말없이 펜만 부지런히 움직였다.



산더미 같던 서류가 예상보다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키타는 내심 뿌듯한 얼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키타 역시 곤도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활동적이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책상에 붙여놓기가 미안할 정도로 부산스러운 그런 녀석이 오전 수업이 끝나고부터 온 종일 회의기록을 정리했다니. 얼마나 지겨웠을까.



마지막 장을 신나게 휘갈겨 쓰고 있는 오키타를 보며 히지카타는 생각에 잠겼다. 녀석은 애초부터 학생회처럼 딱딱하고 재미도 즐길 거리도 없는 집단에 속해있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제 반대까지 물리치고 기어이 총학생회에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녀석의 입장에서는 거슬리는 상대가 있고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집단에서, 심지어 부당한 대우까지 받아가며 이곳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단 한사람 때문.



“곤도씨가 그렇게 좋냐?”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다. 막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던 오키타도 당황했는지 순간 움직임이 멎었다. 히지카타는 제가 말해놓고도 눈매가 조금 일그러졌다. 그걸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만큼 모양 빠지는 게 또 있을까. 속으로 밀려드는 자괴감을 삼키며 그가 괴로워하고 있을 즈음 무심한 목소리가 대답을 내놓았다.



“좋아요.”



게다가 뜻밖에도 비아냥이 담기지 않은 순순한 대답이었다. 오키타는 의자위로 한쪽 무릎을 세우더니 뺨을 기댔다.



“자기는 온갖 손해 보는 짓을 도맡아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겪고 있을 때는 마치 본인 일처럼 달려들어 주잖아요. 보고 있으면 누가 뽑았는지 몰라도 학생회장에 참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낮은 음성이 마치 한숨소리와도 같아서 기묘한 감성을 자극했다.



“비록 일은 매일 땡땡이지만.”



오키타는 기분이 좋은 듯 작게 웃었고 바로 코앞에서 그 웃는 얼굴을 본 심장은 숨차게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남의 칭찬을 그렇게 즐겁게 하는 오키타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지만, 제 앞에 앉은 녀석의 온화한 말투는 퍽 어울렸다. 늘 곤도가 해주었던 것처럼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밀었다. 뺨을 무릎에 부비적거리며 녀석은 말을 이었다.



“어수룩한 점도 좋고 정 많은 것도 좋고 바보 같은 모습도 좋아요.”



아이의 말끝이 흐려지더니 이내 쓸쓸한 빛을 담았다. 꼬리를 잘라먹은 말은 고개를 천천히 내밀어 이미 태양이 떨어진 어두운 창가로 향했다. 말간 시선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이 가득 드리웠다.



“그 사람이 베푸는 호의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의 천성 이라는 거 알고 있지만.”



여전히 창밖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던 녀석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온 몸의 감각이 녀석에게만 곤두서있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나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기뻤어요.”



아마도 홀로 고립되어 버린 적막함 속에서 손 내밀어준 사람이 곤도였을 것이다.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녀석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 준 것도.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녹아들어 갈 수 있게 도와 준 것도. 전부 다. 



그래서 그렇게도 손쉽게 녀석을 길들였던 걸까.



말보다도 더 깊게 마음을 풀어내는 오키타의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아쉬움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고 특별히 무슨 행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 순간 자체가 사랑스럽다는 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들은커녕 자신의 이성에게조차 납득시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분명 마음 한구석은 보드랍고 따스한 무언가가 한 겹 둘러지고 있었다. 시선조차 얽히지 않고 단지 녀석의 눈과 그 안에 가득하던 감정들을 훔쳐보았을 뿐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 *







“누군가를 좋아하는 녀석에게 반하는 취향인가 봐, 내가.”



커피를 마시며 내뱉은 히지카타의 고저 없는 말에 듣고 있던 상대는 마시던 물을 뿜어내었다.



“뭐?”



되묻는 말에 히지카타는 한심한 얼굴로 커피를 쭉 들이켰다.



“…야 무슨 취향이 그렇게 변태스러워? 짝사랑만 주구장창 하고 싶은 거야? 연애전선 한번 진짜 어둡겠는데?”



“니가 봐도 그래?”



누가 봐도 그래. 나란히 책을 받침대 삼아 잔디밭에 걸터앉은 동기는 그렇게 말했다. 



자학하는 취미라도 생겼냐며 키득거리는 그는 히지카타의 등을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남들이 봐도 좀 이상하긴 하구나. 히지카타는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비밀을 고백하던 까만 눈동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는 것을.



아, 그래 나는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생생하게 느끼는 찰나였다. 그 꾸며지지 않은 투박하리만치 날것의 감정이 손에 들어온 순간은 뭐라고 정의내리기 힘든 기분이었다. 뭔가 몹시 아쉬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미칠 듯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하나씩 경험했다면 알지 못했을 동요가 한꺼번에 쓸려 들어와 온 맘을 잔뜩 헤집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이렇게 들끓게 만드는 사람은 녀석 밖에 없었다. 이렇게 스스로의 요령 없음을 원망하게 하는 것도 녀석 밖에 없었다.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히지카타를 이다지도 강렬하게 들쑤시는 존재는 오키타가 처음이었고 이런 경험을 두 번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기 너네 꼬맹이 아냐?”



담배를 꺼내 물고 옆에 앉은 동기가 가리킨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더니 오키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랑거리는 바람에 날아갈듯 조그만 녀석이 양 손에 책을 한가득 안고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 늦은 봄이 마지막 힘을 짜내 내리쬐고 있는 햇빛이 눈부신지 녀석은 잠시 멈춰 서서 후드를 뒤집어썼다. 햇살에 반짝이던 머리칼이 검은색 후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듯 시선을 끌던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히지카타는 피식 웃었다.



“저 녀석이 왜 우리 꼬맹이냐.”



“학생회 마스코트라며. 곤도씨가 자랑을 그렇게 하고 다니던데.”



“그 놈의 고릴라가 주책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람들의 눈길을 타는 걸 꽤나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그날 밤에야 알게 되었지만 녀석은 어릴 때부터 외모 때문에 베풀어지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질릴 만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심 가득한 호의는 꼭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에게 그에 대한 보답과 책임을 강요한다고, 녀석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분노했다. 맘대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끔찍하고, 징그럽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머리라도 까맣게 물들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가 녀석의 단호한 거절을 들었다. 



‘남들이 쳐다본다고 해서 하고 싶은 것 까지 눈치보고 싶진 않아요.’



싫다고 생각 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굽힐 마음은 없는 그 어린애는 그런 고집스러움마저 귀여웠다. 진절머리 나는 일에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무모함이 너무 녀석다워서 그래 어울리면 됐지, 라며 히지카타도 결국에는 말을 아끼고 말았다. 물론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그 옅은 색의 머리칼은 오키타에게 충분히 잘 어울렸다. 까맣게 염색하면, 그래 너무 섹시해 보일거야. 그러니까 밝고 화사한 걸로 지금은 충분해.



히지카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도서관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빤히 보다가 별안간 표정이 굳었다. 어디서 날파리 하나가 또 꼬였는지 어떤 모르는 남자 하나가 오키타의 뒤를 졸졸 쫓아 들어가고 있었다. 막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뒤를 밟던 놈이 용기를 내어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히지카타의 머릿속에 비상벨도 함께 울렸다. 무슨 애가 걸어 다니기만 해도 파리가 꼬여? 무서운 얼굴을 한 채 벌떡 일어난 히지카타는 옆에서 놀라며 쳐다보는 동기에게 먼저 가겠다며 손을 대강 흔들고 언덕을 내려가 도서관으로 달렸다.



목표지점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까지 다다르자 그들의 실랑이도 제법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름이라도 좀 알려주면 오빠가 다 알아서 할게.”



이번에 꼬인 날파리는 평소보다 매우 끈질긴 종자인지 오키타의 손목에 힘줄이 돋아 있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중인 모양이었다. 양 손이 책으로 묶여 있는 틈을 타서 오키타의 한쪽 팔꿈치를 잡은 상대는 질리지도 않고 능글거리며 그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대방의 얼굴이 다가옴에 따라 오키타가 걸음을 뒤로 물리는 사이 뒤집어 쓴 후드가 살짝 벗겨지며 녀석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장이라도 날파리의 뒤통수를 후려칠 기세로 다가가던 히지카타는 정면으로 바로 보이는 오키타의 표정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오빠아? 지금 그 더러운 혓바닥이 내뿜은 쓰레기가 내가 들은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



녀석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벌한 미소가 호선을 그리는 사이로 어금니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주둥이가 더위라도 먹었나. 어디서 지 좋을 대로 입을 놀리고 있어? 그런 역겨운 혀를 함부로 굴리고 다니라고 누가 가르치든. 이름은 알아서 뭘 어쩔 건데? 여기저기 수소문이라도 하고 다니려고? 아니면 과사무실이라도 찾아갈래? 너 좀 모자라는 거 아냐?”



해사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언사에 상대방은 주춤거리며 물러서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 히지카타가 그에게 폭격을 맞았을 때처럼. 하지만 듣다보면 제법 익숙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적어도 히지카타에게만은 이젠 그 말투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넌 사람새끼가 아니라서 양심이 없냐? 그 얼굴 가지고 감히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울 용기는 어디서 나는 거?”



“아, 아니 난, 저, 그게…”



“어디서 말도 똑바로 못하는 게 귀찮게 깔짝거려. 분위기 파악 못 하겠으면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지 그래? 괜히 거치적거리다가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는 날엔!”



주먹을 치켜드는 오키타의 입에서 좀 더 거친 소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히지카타는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섰다. 한 손으로는 그 입을 틀어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 뿜어져 나오려던 쌍소리는 히지카타의 손바닥에 막혀서 목구멍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험악한 시선이 뺨에 와닿는 걸 부시하고 히지카타는 남은 손으로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웅성거리는 도서관 복도를 잰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짧은 소동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소란을 보태고 있었다. 흘끗 돌아보니 녀석에게 들은 험한 소리가 꽤나 타격이 컸는지 날파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난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오키타는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힘주어 떼어내더니 바락 소리를 질렀다.



“선배 뭡니까! 왜 갑자기 방해해요!”



“가만 놔두면 죽일 기세니까 그렇지. 얼굴 팔리는 거 싫다는 녀석이 도서관에서 그런 난동부리면 당연히 이상한 얘기 도는 걸 몰라?”



“그럼 나더러 그런 말미잘한테 개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으라는 소립니까? 내가 뭐 엄한 사람 잡고 있던 것도 아니고 다 그럴 만하니까 잡고 있었는데!”



손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달아난 날파리의 뒤를 쫓을 기세라서 히지카타는 오키타의 모자를 좀 더 힘주어 잡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끌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녀석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고작 누가 집적거리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따라 들어간 제 행동이 허무해졌다. 이 녀석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사람을 잘 내치는 성품인 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



“그거 반납할거지? 소리 그만 지르고 얼른 반납이나 하고 와.”



버둥거리는 오키타를 반납대로 밀어 넣으며 히지카타는 그 손에 들린 책을 두어권 대신 들고서 천천히 뒤를 따랐다. 이 무거운 책들을 들고서 기운도 좋다고 생각하며 작은 등을 약하게 떠밀었다. 제 손이 큰 건지 녀석이 작은 건지 어깨에 얹어진 손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보였다. 아마 품에 안는다면 한 팔로도 넉넉하게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마른 어깨였다. 목덜미도 가늘고 하얀 게 벗겨보면 정말 먹음직스럽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오키타가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생각이라도 읽힌 것 같아 히지카타는 엉겁결에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부회장 저한테 뭐 할 말 있어요?”



“아니?”



“할 말도 없는데 왜 나 따라와요?”



“어, 어…?” 



“갑자기 회의라도 잡혔어요?” 



“아니 그게….”



반질반질한 눈이 똑바로 저를 응시하는 걸 보며 히지카타는 천천히 머릿속이 빙그르 도는 것을 느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저만 홀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이 부끄러운 공간을 당장이라도 탈피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체…체육대회 포스터 붙이라고.”



입 밖으로 멋대로 쏟아져 나온 핑계는 모두가 하기 싫어해서 남겨두던 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일거리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제비뽑기나 가위바위보를 하곤 했던 포스터 붙이기를 히지카타는 순간적으로 놀란 나머지 평소 마음이 가던 후배에게 시키고 말았다.



오키타의 표정은 말라비틀어진 나무젓가락을 씹는 것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 *

  






“토시, 소고 좀 괴롭히지 마.”



“…내가 언제 괴롭혔다 그래요.”



“체육대회 포스터 무작정 소고한테 붙이라고 했잖아.”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물론 너도 절반 나눠서 했다는 거 아는데 그거 말고도 유난히 넌 소고한테 좀 쌀쌀맞은 구석이 있어. 걔가 좀 사나워 보이긴 해도 아무한테나 날을 세우는 앤 아니거든?”



곤도의 부드러운 타이름에 히지카타는 울컥 감정이 치솟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니 본인이 느끼기엔 얼마나 더할까 싶어서 우울해졌다.



날은 정말 더웠다. 학교 건물을 돌면서 게시판마다 포스터를 붙이는 내내 두 사람은 껴입은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나갔다. 그리고 겉옷을 하나씩 벗을수록 점점 두 사람의 말 수는 줄어들었다. 오키타는 모든 게시판을 불살라 버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이는 매점마다 들러 얼음 생수를 사면서 히지카타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때처럼 넓은 캠퍼스를 저주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도대체가 그 녀석은 왜 그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만 하는지. 이제 스스로가 정곡이 찔리면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싫을 만큼 잘 알았으니 제발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답답함이 쌓여서 점점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렇게 안달복달 못하는 걸 내비치고 싶지 않아 애써 마음을 갈무리하다보면 한결 더 차갑게 대하게 되고, 그럼 또 지레 놀라서 마음에 벽을 한 겹 더 두르게 되는 악순환이 고리처럼 반복되었다. 아무리 혼자 속앓이 해봤자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문득 쓸쓸해졌다.



곤도에게 말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히지카타 뺨치게 우직하기만 하고 요령 따윈 없는 남자가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섬세함이라곤 눈을 뒤집어 찾아 봐도 없는 곤도가 나섰다가 오히려 파국에 치달은 커플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잘 된 쪽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철썩 같이 그들의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하면 보나마나 놀라서 허둥대다 오키타에게 전부 실토해버릴 위인이었다.



“맞아. 소고가 쌀쌀맞긴 해도 정이 영 없는 앤 아니잖아.”



갑작스럽게 옆에 있던 선배가 그들의 대화 속으로 난입했다. 오키타를 제법 좋게 보는 모양이었다. 히지카타는 마치 자신의 칭찬이라도 들은 것 마냥 흐뭇해지는 기분이었다. 학기 초의 그 근거 없는 루머들이 이젠 거의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이렇게 녀석 그 자체만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곤도 말도고 여럿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지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온 사람들이 점점 더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수작 거는 것만 아니면 힘든 일 부탁할 때마다 군말 없이 도와주기도 하고.”



“뒤끝도 별로 없어. 대신 그 자리에서 브레이크 없이 쏟아내긴 하지만.”



“그럼! 우리 소고가 가끔 눈웃음이라도 치면 얼마나 귀여운데!”



곤도는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세상에. 총학에 팔불출이 왜 이렇게 많아?



싱글싱글 웃으며 너나 할 거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 걸 들으며 히지카타는 서서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표면적인 녀석의 성격은 빈말로라도 귀엽다고 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 안에든 건 무디고 여린 꼬마라는 걸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정말 인형처럼 생겨서! 만지면 얼마나 말랑말랑할지….”



“그게 말이죠, 언니. 제가 옆에 서봤는데 정말 저보다 얼굴이 더 작더라니까요!”



“그렇지? 사실 옆에 세우긴 좀 부담스러울 만큼 잘생기긴 했어.”



칭찬의 방향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저를 설득시키기 보단 그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는 무리에서 한발 떨어진 히지카타는 말하는 사람들을 한명씩 주의 깊게 살폈다.



“무엇보다 오키타가 곤도씨에게 하는 걸 보면, 뭐랄까…”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한 결 같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히지카타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듣지 않아도 그 다음 말을 알 것만 같았다.



“살쾡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길들여지는 걸 보는 것 같아.”



“맞아. 그게 또 보는 사람을 미치게 하잖아!”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토네이도처럼 착잡함이 몰려들어 머릿속을 세차게 뒤집어엎었다. 저에게 예뻐 보이는 건 남들에게도 예뻐 보인다는 소리고 제가 원하고 바라는 건 남들도 그만큼 가지고 싶어 하리란 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커다란 쇠망치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간 것 만 같았다. 초조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미적거리며 걱정만 하던 마음에게 어서 달리라고 채찍질했다. 당장이라도 녀석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어느새 모두가 하나 되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히지카타는 조용히 문을 열고 학회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문을 닫는 순간 모퉁이에서 갈색 머리통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선배?”



튀어나온 녀석이 오키타 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히지카타는 그의 팔을 붙잡고 다짜고짜 엘리베이터로 잡아끌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팔에 끌려가면서 오키타는 발목이 꺾였는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황급한 목소리가 계속 되물었지만 지금 절대 녀석을 학회실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아무런 말없이 저를 끌고 가는 히지카타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오키타는 웬일인지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지. 이번엔 제발 이상한 잡일 좀 시키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히지카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랑 점심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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